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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3.25  07: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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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안 휘 / 그림:문 악 보

 

‘우산도(于山島)’

     -이사부, 우산국을 정벌하다 -제29회-

제10장- 서라벌(徐羅伐)

10.2 비사(秘史)

“장군님. 마님께서 안방으로 건너오시랍니다.”

숙취가 깊었음에도 이사부는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녘에 잠시 들었던 선잠에서 깨어났지만 머리를 쉽게 들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시종아이가 방문 밖에 와서 모친의 말을 전했다.

안방에는 두 개의 밥상이 따로 차려져 있었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어머님!”

이사부가 방으로 들어서며 문안인사를 올렸다.

“그래.... . 네 목소리를 들어보니 잠자리가 편치 못했던 게로구나.”

“아니옵니다. 괜찮사옵니다.”

“어서 앉아서 조반 들어라.”

그렇게 말하는 모친 역시 평온한 얼굴빛은 아니었다.

금방 차려진 밥상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이사부가 어머니의 맞은편에 따로 차려진 밥상머리에 앉았다.

“상차림이 먹음직스럽습니다.”

이사부가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네가 어릴 적부터 잘 먹던 음식들로 장만하라 일렀는데, 입에 맞을 런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많이 먹거라.”

밥상 위에는 산나물과 닭고기와 해산물 등 이사부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잘 차려져 있었다. 이사부는 모처럼 어머니와 한 자리에 앉아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모친은 밥을 먹는 이사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밥상을 물린 다음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어제 입종 왕자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더냐?”

“소자가 입종 형님에게 서라벌의 야릇한 공기에 대해서 말씀 올리고 어찌 처신해야 좋을 것인지를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답을 하더냐?”

“형님께서는 숙고 끝에, 조속히 임지로 떠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모친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일었다.

“하슬라로 빨리 떠나라고 했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서라벌의 정치를 잊으라는 말도 함께 하셨습니다.”

모친의 손에서 미묘한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모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궐 안에서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는 증좌로구나. 폐하의 노환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요즘 왕비인 연제부인(延帝夫人) 박 씨와 폐하의 장인이자 왕비의 부친이신 이찬 등흔(登欣)이 자주 만나 뭔가를 숙의한다고 들었다.”

“왕비마마와 이찬께서 뭔가를 숙의하신다고 하셨사옵니까?”

“그러하다는 구나. ....이리 가까이 다가앉거라.”

모친은 갑자기 이사부에게 가까이 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선왕이신 소지 마립간으로부터 현왕으로 보위가 양위되는 과정에 얽힌 비사(秘史)가 있느니라.”

“비사라 하오시면?”

“소지 마립간께서 마흔 한창 나이에 선위를 결정한 것은 날이군(捺已郡, 영주 일원)의 절세미인 벽화(碧花)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한낱 염사(艶事) 하나로 왕이 물러날 수 있나이까?”

“선왕께서는 후사가 없으시지 않았느냐? 그런 상태에서 벽화를 별실에 두고 아들을 낳았으니 그게 불씨가 된 것이다.”

“후사가 없으신 왕께서 아들을 낳았으면 경사가 아니옵니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비록 날이군이 신라국의 영토가 되긴 하였다마는 벽화의 아비 파로(波路)는 고구려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한 호족이었다. 그게 화근이었느니라.”

그 제서야 이사부는 모친의 말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벽화와 그 아들을 방치할 경우 신라국의 왕권이 고구려 충신의 외손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발동했다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것이었다. 파로가 선왕의 행차를 기회 삼아 계획적으로 딸을 바쳤고, 두 사람 사이에서 첫 아들이 났으니 신라왕실이 위험에 빠졌다는 생각이 발동한 것이란다. 그래서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었고, 결국 선왕은 폐위되고 현왕이 즉위를 하게 되셨다는 이야기이니라.”

“어머님께서 지금 제게 이 같은 비사를 상기시키시는 연유를 여쭈어 봐도 되겠사옵니까?”

모친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그 때, 바로 선왕의 폐위와 현왕의 즉위를 도모한 핵심인물들이 바로 지금의 왕비이신 연제부인 박 씨와 그 부친인 이찬 등흔이었다.”

순간 이사부의 뇌리에 무엇인가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그랬었구나. 그래서 어머님께서 크게 근심하고 계시는구나... .

모친은 말을 더 이어갔다.

“선왕의 서거와 관련해서도 한동안 흉흉한 풍문이 있었다. 자연사가 아니었다는 풍설이었다.”

“자연사가 아니라 하오시면...?”

모친은 침을 한차례 꿀꺽 삼킨 뒤, 귓속말을 하듯 목소리를 한껏 줄였다.

“권력의 속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왕비마마와 이찬 등흔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더냐. 박 씨 가문의 중추로서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무슨 일인들 마다 않고 다 하셨던 분들이다. 그분들께서 작금에 너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가당찮은 소문들을 어떻게 들을까 그게 걱정이다. 비록 적통을 이을 손자가 없다고는 하나, 그분들에게는 반드시 원종에게 왕위가 선양되도록 해야 하는 필사적인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이사부는 비로소 모친의 말뜻을 다 알아들었다.

“소자 이제야 어머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겠나이다. 칼과 말고삐를 움켜쥐고 전장에서만 굴러온 소자와 같은 무부의 전정과 관련하여 귀족들이나 백성들 사이에 일어나는 풍설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사옵니다.”

모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마도 거친 전장에서 명을 다한 남편 아진종(阿珍宗)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모친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한참을 망설였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도 하였는데, 할까 말까 갈등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어머니. 제게 더 들려주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이사부가 어머니의 마음을 먼저 읽고 물었다. 모친 보옥공주는 눈물을 닦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제 네가 장성하였고, 또 이처럼 궁지에 몰리는 형편이 되었으니, 내가 무엇을 감추겠느냐. 다 말해주마.”

“...... .”

“네 아버지는 폐하께서 즉위한 뒤, 왕과 동일한 반열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왕궁에 머물지 못하고 외성 전쟁터를 전전하실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네 아버지 아진종께서는 지금의 폐하보다도 더 촉망받는 왕재로 손꼽히셨느니라. 궁성 안에는 네 아버지를 따르는 이들이 더 많았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모친은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왕이 되고자하는 욕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더욱이 폐하의 등극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박 씨 가문의 악착같은 의지가 뒷받침하고 있었으니 네 아버지는 밀려날 수밖에 없으셨다. 물론 권력투쟁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네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아직은 온전치 못한 서라벌의 안정을 위해서 피비린내 나는 정쟁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판단이셨지. 결국 네 아버지는 폐하를 만나서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물러서셨단다.”

“그 이후 아버님께서 굳이 변방으로 전전하셔야 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폐하의 등극 이후에도 네 아버지에게 몰린 민심이 좀처럼 폐하에게로 돌아서지 않았다. 왕궁 쪽의 신경이 곤두서게 되고, 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위협을 느끼시기에 이르렀지. 그래서 국경지대로 나돌다가 종당에는 객사하고 만 것이다. 나라의 안위와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희생되신 것이니라.”

어느 새 모친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사부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소자가 어찌 아버님의 가없는 충절을 망각하겠나이까? 그렇지 않아도 나라를 위한 아버님의 헌신과 희생을 가슴에 깊이 새겨 기리며 살아 왔나이다. ....그런데, 전사하신 아버님의 최후가 아무리 슬프다 한들 어찌하여 어머님께서는 시력마저 상하실 만큼 설움을 견디지 못하셨나이까?”

모친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훔쳤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깨물며 말문을 다시 열었다.

“네 아버지는 전투 중에 돌아가셨지만, 최소한 말갈족에게 당하신 것이 아니다.”

이사부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

“말갈족 군사에게 당하신 게 아니라니요?”

“네 아버지는 독살되셨다.”

“어인 말씀이신지요?”

“확실한 증좌는 없다. 하지만, 그 당시 서라벌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칼자루를 쥔 세력들이 네 아버지를 살려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 ?”

“돌아가신 네 아버지의 시신을 본 순간 나는 확신했다. 기어이 살해되셨구나, 하고..... . 억장이 무너져서 버틸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데, 기어코 그렇게 비운의 죽음을 맞으신 모습이 너무나 가엾었단다. 견딜 수가 없는 슬픔이었느니라.”

그날의 설움이 되살아나는 듯 모친은 소리를 죽인 채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사부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셨구나. 그렇게 기막힌 죽음 앞에 어머니도 그예 무너지신 것이로구나. 허탈한 가슴을 달래며 모친의 손을 꼭 잡았다.

모친은 눈물을 닦으며 마음을 가누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 팔자가 참으로 박복하구나. 아들이 이렇게 신라국의 큰 영웅이 되었건만.... 운명이 왜 이리 고약하게 대물림되는 것인지...... . 내가 왕족 김 씨 가문의 일족임에도 불구하고, 복잡다단한 서라벌의 정치상황 속에서 너 하나 지켜내기가 이리 버겁게 될 줄은 정말 몰랐구나.”

이사부가 몸을 앞으로 숙여 모친의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어머님!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소자 어찌하든 이 난관을 헤쳐 나가겠나이다.”

모친이 이사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 암, 그래야지. 아마도 지나간 몹쓸 일들 때문에 측은하여 그리 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마는, 폐하께서 너를 보살펴주시니 그나마 다행인 듯싶구나. ....입종 왕자께서 네게 서둘러 임지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니, 어쨌든 일단 그 말을 따르는 게 순리일 것이다. 소나기는 우선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랴. 날이 밝는 대로 폐하께 하직인사를 올린 다음 하슬라로 떠나거라.”

이사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눈물을 닦았다.

“예. 소자 어머님의 말씀을 따르겠나이다.”

안방을 물러나온 이사부는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봉당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서라벌 하늘에 무심한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밴 솔향기 한 자락이 후각을 자극했다.

*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하면 피가 끓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미련을 가질 일은 따로 있지 않았다. 소싯적부터 이사부의 흉중에는 언제나 신라국의 웅비 오직 그것 하나뿐, 맹세코 다른 그 어떤 욕망도 담아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반도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동해를 먼저 장악한 일이 신라국에 커다란 저력이 되리라는 것을 이사부는 육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신라의 국운융성이 이만큼 가까워졌으니,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사부는 하직인사를 위해 대궁으로 달려가 왕의 처소를 찾았다. 노환으로 쇠약해진 왕은 처소 앞에 엎드린 이사부를 이윽히 바라볼 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폐하! 소장은 오늘 서둘러 임지 하슬라로 떠날까 하옵니다. 부디 옥체 일안만강(日安萬康)하시옵소서.”

자신을 그토록 귀애해주는 왕을 보는 것이 어쩌면 오늘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이사부는 자꾸만 먹먹해지는 가슴을 달래고 있었다.

“좀 더 쉬었다 떠나도 좋을 터인데, 왜 그리 서두르는고?”

왕의 목소리는 역시 예전 같지 않았다. 힘이 많이 빠진 음성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북방과 동해안 일대의 전선을 정비하는 일이 시급하옵고, 왜구의 출몰도 아주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오라 지체할 여유가 없나이다.”

“과연 태종 이사부 장군은 신라국 최고의 무부요 충신이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래. 어서 임지로 가서 소임을 다 하라. 나라를 지키는 일에 부족한 일이나 왕실의 지원이 필요하면 즉시 짐에게 전갈하라. 무엇이든지 이사부 장군을 믿고 맡길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사부는 왕에게 큰 절을 올리고 궁전을 물러나왔다.

*

명진, 호위 군사들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는 이사부의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만난을 헤치고 밤이슬을 맞아가며 산야와 바다에서 매일같이 목숨 걸고 살았던 지난 세월이 길었다. 과연 그 세월이 무엇이었는지 자꾸만 정체가 희미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우산국 정벌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나날...드디어 우산국을 복속하던 그날부터 부풀었던 기대...서라벌에 돌아오면 오직 영광과 환희만 있으리라 여겼던 뜨거운 기억들이 하나씩 뇌리를 스쳐갔다.

말을 달려 임지로 나아가는 길에서 이사부는 사뭇 혼란스러운 사념의 늪 속을 헤맸다. 아니, 자꾸만 뻣뻣해지는 의식 속에서 가능한 마음을 비우고 그 어떤 원심(怨心)에도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군주님. 해리현에서 묵어가시겠습니까요?”

명진이었다.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산단화 낭자가 꽃으로 깨어났다. 산단화..... .

“그렇게 하자. 어차피 하루 묵어서 갈 길이면 거기에서 유하자꾸나.”

“예.”

명진이 일행을 향해 목청을 돋워 일정을 알렸다.

해리현에 도착할 즈음에는 날이 이미 다 저물어 있었다. 이사부 일행은 산단화가 살던 바닷가 마을로 갔다. 촌주의 집은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말발굽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촌주의 집을 살폈다. 그들 중 처자 하나가 마당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혹시 하슬라 군주님의 행차가 아니온지요?”

동그란 얼굴....눈 여겨 보니 알만 한 인물이었다. 이사부가 반가움을 표시하며 앞으로 나섰다.

“산단화 낭자와 함께 울릉도로 잡혀갔던 처자 아니시오?”

“예, 그렇사옵니다. 이제 뭍으로 돌아오셨군요. 군주님.”

처자는 이사부 앞에 엎드려 절을 하여 예를 갖췄다. 그녀를 바라보는 이사부의 가슴속에 산단화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한 번 폭발하고 있었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구려. 섬까지 끌려가서 고초가 많으셨소.”

처자도 이사부를 바라보는 순간 죽은 산단화 낭자 생각이 났던지 금세 눈망울을 붉혔다.

“아니옵니다. 저희들이야말로 군주님이 아니었던들 거기 울릉도 앞바다에서 필경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을 목숨이었사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사오나, 그예 살아 돌아오지 못한 촌주님과 산단화 아씨를 생각하면 슬프고 죄스럽기 짝이 없나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사부의 콧날이 시큰해지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돌아간 뒤 이사부는 혼자서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 위에 높이 뜬 달이 밝았다. 이사부는 오랫동안 바닷가를 거닐며 추억에 깊이 잠겨 있었다. 산단화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추억으로 되살아나 가슴속에 시린 물줄기 하나를 흘리고 있었다.

*

서라벌에서 하슬라로 귀임한 이후 달포쯤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진영을 한 바퀴 둘러보고 경계태세를 살피고 수군들의 훈련 상황을 점고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특히나 그날은 울릉도를 정기적으로 오갈 상선에 관한 일까지 처결하느라고 더욱 번다한 날이었다. 늦은 밤 곤한 몸을 뉘어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처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군주님! 취침하셨나이까?”

명진이었다. 이사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니다. 무슨 일이냐?”

“예. 방금 서라벌 본가에서 사람이 달려왔사옵니다. 마님의 전갈을 가지고 왔다 하옵니다.”

“어머님께서 전갈을 보내셨다 하였느냐? 어서 들이라.”

이사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낯익은 본가의 시종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도련님! 강녕하셨사옵니까?”

“그래. 먼 길 왔구나.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들어가서 여쭙겠나이다.”

이사부가 시종을 방안으로 들였다. 얼마나 쉼 없이 달려왔는지, 시종의 옷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어머님께 무슨 일이라도 난 거냐?”

이사부가 거듭 물었다.

“아니옵니다. 마님께서 주신 서찰을 갖고 왔습니다.”

시종은 그러면서 등허리에 가로질러 맨 보따리를 풀어 죽간을 꺼냈다.

이사부는 간솔 불을 돋우고 죽간을 펼쳤다. 누군가에게 구술로 대필하여 보낸 어머니의 서찰이었다.

‘서라벌 금성에서 기어이 험한 일이 생겨나고 있구나. 이틀 전 너를 따르던 장수 강현(剛玄)이 한 밤 중에 주살 당했다. 또한 상탁(象卓), 부항(斧恒) 두 장수 또한 구금 중이라 한다. 머지않아 그들로 하여금 역모의 죄가 토설될 것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구나. 신라국 최강의 정예군을 이끌고 있는 너를 노리는 칼날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다. 너는 이 서찰을 받는 즉시 폐하께 하직을 주청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당분간 어딘가 심처에 은거할 방안을 찾거라.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구나. 서둘러야 하느니라. 부디 자중자애하기를 바란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이사부는 가슴을 찌르는 고통을 느꼈다. 그토록 피해가고자 했건만, 결국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 아니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다. 이대로 말을 몰아 서라벌로 달려가야 할 것인가. 왕궁 앞에서 할복이라도 하여 속을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 강현이 죽었다니? 그 강직한 신라의 장수가 억울하게 죽었다니? .....이사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눈치를 보고 있던 시종이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말했다.

“사실은 서라벌에서 은밀히 모시고 온 분이 있사옵니다.”

“은밀히? 누구더냐?”

“하문하지 마시옵고, 지금 소인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시옵소서.”

이사부는 서라벌에서 은밀히 찾아온 사람이 누구일까 골똘히 생각했지만 짐작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께서 먼 길을 그렇게 달려오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출타준비를 대략 마치고 시종을 앞세워 주청을 나섰다. 앞장 선 시종이 말을 때려 빠른 속도로 하슬라성을 빠져나갔다. 이사부가 그 뒤를 바쁘게 따라 잡았다. 밤이 워낙 깊었고,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초롱거렸다.

시종을 따라 한참 만에 당도한 곳은 해변이었다. 하슬라 외곽 동해에 연접한 바닷가 작은 마을의 허름한 초막집이었다. 파도 소리가 금세 초막을 덮칠 듯이 크게 들려왔다. 울타리에 말이 매어진 초막집 마당에는 집주인들로 보이는 노부부가 초조히 서성거리고 있었다.

먼저 말에서 내린 시종이 초막집 방문을 열어젖힌 뒤 비켜서며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도련님.”

이사부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초막집 안방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어서 오시어요. 장군님!”

문 쪽을 향해 마주 서 있는 여인의 형상이 희미한 간솔 불빛에 드러났다. 그 자태가 눈에 미처 다 비쳐들기도 전에 이사부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렸다. 천만 뜻밖의 손님이 거기 서 있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지소? .....지소부인 맞사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장군님. 소녀 지소이옵니다.”

지소가 오다니?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까지 지소가 찾아오다니...?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사부는 황황히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아니, 왕자비 마마께서 이 원처까지 어인 일로 납시었사옵니까?”

불빛에 다 드러난 얼굴을 보니 과연 지소가 틀림없었다. 눈을 부비고 다시 살펴보아도 산단화 낭자를 똑 닮은 지소의 얼굴이었다. 지소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사부 아제. 소녀와 단둘이 있는 자리이오니 예전처럼 대하여 주옵소서.”

“그래도 어찌.... .”

이사부가 망설이는 소리를 하자 지소는 더욱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 오늘은 아비인 원종 왕자의 딸이 아니라, 지아비 입종 왕자의 비도 아니라, 장군님의 조카딸 또한 아니라, 오직 장군님을 한없이 연모하는 한 여인으로서 먼 길 달려왔사옵니다.”

이사부의 가슴에 고였던 긴장이 얼음 녹듯 화르르 녹아내렸다. 지소의 얼굴을 더욱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리땁던 옛 모습 그대로였다.

“이렇게 보게 되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구려.”

“소녀도 장군님을 이렇게 뵈오니 기쁘기 한량없사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귀한 몸으로 이렇게 먼 곳까지 나를 찾아온 것이오? 더욱이 요즘 나에 대한 서라벌 왕궁의 기류가 온전치 못하다고 듣고 있는데..... .”

“바로 그래서 소녀가 이렇게 황급히 장군님을 뵙고자 달려온 것이옵니다. 백성들 사이에 날이 갈수록 장군님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이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말이 저의 할미이신 왕비마마의 입에서 먼저 나왔고, 외증조부이신 이찬 등흔(登欣)께서 은밀히 귀족들의 중론을 모아왔사옵니다.”

“풍문이 사실이었구려. 나의 막역한 전우 강현 부장을 주살하고, 상탁과 부항 부장을 구금한 일도 그 힘이 작용한 사달인 모양이오이다.”

또다시 긴장이 꿈틀거렸다. 지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바로 그러하옵니다. 장군님을 역적으로 몰아 위해를 가하려는 움직임이 날로 구체화되고 있사옵니다. 장군님을 따르는 서라벌의 세 장수를 제압한 일이 그 시작입니다. 구금된 상탁과 부항을 형문하여 누명을 지어낼 것입니다.”

이사부의 눈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다는 것이오? 사시사철 전장에서 한뎃잠을 마다 않고 몸 바쳐 나라를 지키고 있는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 또 나를 따르는 장수들이 나라에 대한 충의를 나눈 것 외에 무슨 헛된 꿈을 꾸었기에 그렇게 역적으로 몰려야 한다는 것이오?”

지소가 이사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아니옵니다. 장군님께는 아무런 허물도 있지 않사옵니다. 장군님이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전공을 세우신 신라국의 영웅이옵니다. 하옵고..... .”

“....... .”

지소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소녀가 살아있는 한, 장군님께서는 소녀가 일심으로 지켜야 할 또 하나의 목숨이기도 하옵니다.”

이사부는 지소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어린 시절 가슴을 적셨던 연정이 폭발하듯 되살아났다. 입종 왕자에게 시집가던 날에 하염없이 울던 그녀의 모습이 마치 어제의 일인 양 떠올랐다.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이사부는 지소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지소가 다시 이사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소녀가 이런 말을 한다고 제 아비 원종 왕자의 전정만을 위하는 행동이라고는 부디 오해하지 말아주시옵소서,”

“..... .”

“지금은 장군님께서 다 내려놓으시고 연명을 도모해야 할 때이옵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내가 추호도 그르지 않았는데, 왜 비겁하게 도망쳐야 하는 것이오?”

“옳고 그름으로만 가름되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랍니다. 역사에서는 반드시 옳은 것이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전장을 수없이 겪으신 분이오니 소녀보다도 더 잘 아실 것 아니옵니까?”

맞는 말이었다. 전장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오직 힘이 센 쪽이 약한 쪽을 죽여 이길 따름이었다. 옳고 그름이란 그저 죽고 죽이기 이전에만 통용되는 가치논쟁일 뿐이다. 지소가 말을 이었다.

“장군님께서 쌓아 오신 공덕이 크고 중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하오나 지금 서라벌 정치에서 장군 이사부는 오로지 견제와 제어의 대상일 뿐, 권력의 균형추는 이미 기울었사옵니다.”

“도대체 그들이 왜 나를 견제한다는 말이오? 나라를 위해서 전공을 세우고, 변방에서 국방의 소명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나 같은 무부에게 왜 그래야 한다는 것이오?”

“권좌에 있는 분들을 그렇게 추동하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옵지요. 제 할아비이신 폐하를 왕으로 세우시는 일을 도모하셨던 할미와 외증조부께서 지금은 장군님에게서 큰 두려움을 느끼고 계신 것이지요. 더욱이 장군님께서는 많은 백성들이 추앙했던 왕재 아진종의 자제이시니 경계심이 다를 것이옵니다.”

지소의 말은 옳았다. 두려움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기를 낳고, 때로는 음모를 지어내기도 한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지는 권력의 음모는 전쟁보다도 더 잔혹한 법. 이사부는 지소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우산국 정벌을 위해 충심과 전력을 다해온 내가 오늘 이런 처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지소가 다시 이사부의 손을 잡았다.

“장군님! 장군님께서는 무조건 살아남으셔야 하옵니다. 신라를 위해서도 그러하옵고, 무엇보다도..... .”

“...... .”

“무엇보다도 소녀를 위해서 살아남으셔야 하옵니다.”

이사부를 바라보는 지소의 표정이 너무나 간절했다. 심사가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냥 그러다가 말 줄 알았다. 입종 왕자의 말대로, 서둘러 임지 하슬라성으로 돌아와 정녕코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군문의 일에 매진했다. 그러다보면 서라벌의 권부에서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부터 제압하면서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알겠소. 내 그대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깊이 고민하겠소.”

“고맙사옵니다. 장군님. 정말 감사하옵니다. 부디 자중자애하시고 훗날을 기약해 주시옵소서.”

자중자애..... . 모친의 서찰에 있었던 똑같은 말을 지소가 입에 담고 있었다. 이사부는 지소의 눈물 젖은 얼굴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희미한 안도의 빛이 보였다. 지소가 다시 말했다.

“소녀는 아옵니다. 소녀와 장군님의 인연은 여기가 끝이 아님을 아옵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언젠가 다시 이어질 연분이옵니다. 소녀는 소녀의 예감을 굳게 믿사옵니다.”

이사부는 지소의 말을 희미하게나마 알아들었다. 자신이 지소를 얼마나 연모했는지, 지소 또한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한동안 서로를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

“서라벌로 돌아가서 어머님께 말씀 올려라. 주신 말씀 그대로 따르겠노라 말씀 전하고, 심려하지 마시라고 아뢰어라.”

말안장에 오르기 전 이사부가 서라벌 본가 시종에게 조용히 말했다. 시종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사부의 명을 받았다.

“그리 전해 올리기만 하면 되옵나이까?”

“그렇다. 그리 전하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으실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하명하신대로 마님께 아뢰겠나이다.”

지소가 탄 말을 앞세운 시종이 말을 때려 바람처럼 해변을 떠났다.

하슬라성 처소로 돌아온 이사부는 결가부좌하고 앉아 묵상에 들었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신라국 서라벌의 왕족으로 태어나 일편단심 나라를 생각하며 살아 온 일생이었다. 갓 스물을 채우지 못한 어린 나이에 장수가 되어 그때부터 춥거나 덥거나 영일 없이 전장을 누빈 나날.... . 강성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한 일 말고는 단 한 순간도 다른 마음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치열한 삶이었다.

풍찬노숙의 고난을 마다않고 전장을 누빈 끝에 미리미동국을 복속하여 추화군을 설치했던 일로 신라국의 영웅이 되었다. 실직주의 첫 군주가 되어 복속을 거부하는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국경을 넓히는 일에 혼신을 다 바쳤다. 우산국 정벌을 위해 흘린 피땀은 또 얼마이던가.

이사부는 마치 꿈속인 양 그림처럼 생생히 흘러가는 지난날의 일들을 회억하면서 이제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할 것인지를 번민했다.

지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숨이 났다. 대체 어떤 질긴 인연이기에 지소와의 상봉과 별리는 번번이 이리도 아프기만 한 것인가.....지소의 얼굴과 그와 똑 닮은 산단화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어느 날 문득 가슴속에 옹이처럼 깊이 박힌 인연이었지만, 흔연히 사랑해주기는커녕 끝내 목숨조차 지켜주지 못한 회한의 여인. 그녀의 해맑은 얼굴이 되새김되면서 심장에 박힌 가시를 건드린 듯 아팠다. 이사부에게 지소는 곧 산단화였고 산단화는 곧 지소였다. 끝내 맺어지지 못한 두 인연은 아련한 추억 속에서 결국 하나였다.

지대로왕의 크나큰 사랑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느껍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 분이 죄 없는 아비를 살해한 비정한 군주라 해도, 은혜 또한 끝내 미워할 수 없을 만큼 깊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무장의 몸으로서, 총애해주는 왕을 위해서 죽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건 아니다. 나라를 위해 혼신을 다해 승전한 일로 백성들에게 영웅으로 칭송받고, 더러 신(神)으로까지 일컬어진 일이 어찌하여 허물로 치부되는가. 그게 왜 견제와 핍박의 빌미가 되는가. 그게 어찌하여 명을 조임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원인이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네가 왕실의 종친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전장으로만 나돌며 성숙해온 무인이라 서라벌의 정치는 아주 모르지 않느냐...이 서찰을 받는 즉시 왕께 사직을 주청하고 어딘가 심처에 은거할 방안을 찾아 내거라. 그리하여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구나......모친이 하던 말과 서찰내용이 겹쳐 떠올랐다. 전쟁 말고는 아는 게 없는 무부로 살면서, 정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 끝내 이리 큰 죄가 될 줄은 정녕 몰랐다.

이사부는 문득 아버지 아진종의 죽음을 떠올렸다. 서라벌 궁성을 벗어나 변방을 떠돌던 아버지의 심사가 필경 이러했을 것이다. 실직성에서 그렇게도 닿아보고자 했던 아버지의 심중에 비로소 닿은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와 지소의 말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선택일 것이다. 맹세코, 왕이나 신이 되고자 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떠도는 말이 다 헛된 게 진실이다. 과거와 현재를 불문하고 모반을 일으킬 마음 또한 단 한 순간도 있지 않았다. 모면할 길 없는 의심으로부터 일단 벗어나는 일은 비굴함도 비겁함도 아닐 것이리라.

이사부는 죽간을 펼쳐 놓고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원종 왕자에게 올릴 서찰을 곧바로 써내려갔다.

‘소장 이사부 원종 왕자님께 아뢰옵나이다. 형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신라국의 장수로서 분수에 넘치는 호사를 참으로 많이 누렸나이다. 다름이 아니옵고, 소장이 근년 우산국 정벌을 비롯하여 능력에 부치는 과업을 오래도록 수행함으로 인하여 기진(氣盡)이 날로 깊었사옵니다. 심신이 온갖 임무를 감당하기에 적합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음을 하소하옵나이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장은 하슬라 군주로서의 일체 직분을 사직하고 황급히 치병을 위하여 피접(避接)을 떠나야 할 처지에 놓여 있사옵니다. 국경을 지키는 장수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오나, 심신을 주체할 여유가 없도록 쇠약해진 몸으로 더 이상 소임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사오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형편을 소장이 직접 폐하께 아뢰어 윤허를 상신함이 도리인 줄 아오나, 근간 폐하의 옥체가 미령하시어 기상이 예 같지 않으시다 하와 부득이 원종 형님께 읍소하옵니다. 부디 형님께서 이 못난 아우의 형편을 폐하께 소상히 사뢰어 소장의 간청을 가납하시도록 해주시옵기를 엎디어 비나이다. 조속한 하회를 기다리옵니다.’

장계를 다 쓴 이사부는 다시 한 번 찬찬히 내용을 훑어 읽었다. 쓸쓸한 기운이 가슴 한복판으로 젖어들었다.

이른 새벽, 잠을 이루지 못해 정좌하고 앉아 묵상에 든 이사부의 앞에 어머니가 끔찍한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환영(幻影)이었다. 온몸을 결박당한 채, 군사들에게 끌려가는 어머니의 두 눈에서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절박한 목소리로 이사부에게 위험을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서 화를 피하라고 자꾸만 외치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이사부는 목이 터져라 어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어머니는 군사들에게 끌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가슴에 칼을 맞아 절명한 장수 강현을 실은 달구지가 보였다. 피투성이가 된 상탁, 부항이 줄줄이 묶인 채 끌려가는 장면도 나타났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숨이 차올랐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가위눌림이 깊었다. 이사부는 양팔을 앞으로 뻗어 기를 뿌리며 고약한 염몽(厭夢)을 떨쳐냈다. 축축이 젖은 속옷 깃을 서늘한 새벽공기가 물어뜯고 있었다.

-연재 30회(최종)로 이어집니다-

<註>

* 날이군(捺已郡, 영주 일원) * 염사(艶事 남녀 간의 정사나 연애에 관한 일) * 염몽(厭夢 불길한 꿈. 또는 가위눌리는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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