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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영유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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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2.24  07: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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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국 정부는 1952년 1월 18일자로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 이른바 '평화선'을 선포하였다. 그 안에는 현재의 한국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로 되어 있는 독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같은 해 1월 28일자로 다케시마[竹島], 즉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문서를 한국 정부에 보내옴으로써 '독도문제'가 한·일 양국간의 외교상 쟁점으로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이후 한·일 양국정부는 독도에 대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상대국 주장에 항의·반박하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교환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측은 1905년 시마네 현[島根縣] 고시(告示)를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이는 시기적으로 보아 한반도 침략을 목적으로 한 영토편입 형태로, 1905년 이전에도 일본이 독도를 배타적으로 영유하였다는 근거가 없는 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편입은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독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교적 교섭 이전에 1905년 이전의 역사를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배경

독도는 오랫동안 무인도로 있었으며,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鬱陵島)와는 모자관계에 있는 섬이다. 독도의 역사는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야 된다.

울릉도에 세워진 우산국은 하슬라주 군주(何瑟羅州軍主)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에게 정벌된(512) 후부터 내륙의 왕조(신라·고려)와 조공관계를 맺고 토산물을 바쳐왔다. 11세기초 동북여진족(東北女眞族)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우산국은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늦어도 1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되어버린 것 같다.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거론된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의 동계(東界) 울진현조(蔚珍縣條)에 비록 '혹 이르기를'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였지만, 무릉(울릉도)과 함께 우산(독도)이 있음을 확인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 〈세종실록 世宗實錄〉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 하여, 동해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울릉도가……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계승하면서도, 일설에는"우산과 무릉은 본디 한 섬이라고 한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반면에 조선왕조의 공도정책(空島政策)은 울릉도와 독도를 점차 잊혀져가는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조선 초기 태종(1401~18 재위) 때부터 내륙으로부터의 피역민(避役民)을 쇄환(刷還)하거나 왜구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하여 관원을 파견하여 도민을 철수시켰다. 울릉도 공도정책에 대해서는 그뒤 수정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여러 번 제기되었다. 울릉도에 읍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정 논의에도 불구하고 공도정책은 계속되어, 거주민들을 쇄환하고 이들에게 '본국을 모반한 죄'를 적용하여 처벌하기까지 하였다. 그결과 내륙인들의 울릉도 왕래는 끊어지게 되었다.

울릉도분쟁과 독도

울릉도와 독도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는 것은 17세기말 안용복(安龍福)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경상도 동래출신 어부 안용복이 1693년(숙종 19) 봄 울릉도에 출어(出漁)하였다가 일본 어민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납치되었는데, 그는 현지에서 일본 어민들이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출어하는 데 대하여 항의하였다. 안용복의 항의가 있자, 대마도주(對馬島主)는 그해에 조선 어민들의 일본령 죽도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서계(書契 : 외교문서)를 예조로 보내왔다. 죽도는 울릉도에 대한 일본측 호칭이었다. 그러므로 이 요구를 조선측이 받아들인다면, 울릉도 영유권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조선측은 이런 대마도주의 속셈을 잘 알면서도 마찰을 피하고자 하여 죽도 출어는 금지시키되, 울릉은 조선 영토임을 밝히는 서계를 대마도로 보냈다. 대마도주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694년 다시 서계를 보내어, 조선측 서계에 있는 '울릉' 두 자의 삭제를 요청해왔다. 대마도주의 요청이 이처럼 집요하였으므로 조선측에서도 강경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죽도, 즉 울릉도는 조선의 판도로서 〈여지승람 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하고, 앞으로 일본 어민들의 왕래를 금한다는 내용의 서계를 대마도로 보냈다.

대마도주는 이런 조선측 통보에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바쿠후(幕府)는 1696년에 죽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여 어민들의 도해금지령(渡海禁止令)을 내렸다. 또 그해 여름 다시 울릉도에 출어했던 안용복은 일본 어선을 추격하여 자산도(子山島), 즉 독도를 거쳐 일본 백기주(伯耆州)에 당도하여, 울릉도에 출어했던 일본 어민들의 처벌을 주수(州守)로부터 약속받고 돌아왔다. 사정이 이에 이르자 대마도주도 1697년 동래부로 서계를 보내어,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어채(漁採)를 금한다는 막부의 결정을 알려와서 조 일간 울릉도 영유권 분규가 타결을 보게 되었다.

울릉도 영유권 분규가 매듭지어지자, 조선정부는 그해(1697)에 3년에 1번씩 삼척영장(三陟營將) 등이 울릉도를 순찰하는 울릉도 수토제도(搜討制度)를 정식화하였는데, 그 기원은 울릉이 곧 조선판도라는 서계를 대마도로 보낸(1694) 직후에 있었던 삼척첨사(三陟僉使) 장한상(張漢相)의 울릉도 순찰에서 찾을 수 있다.

수토가 정기적으로 실시됨에 따라 동해의 지리가 밝혀졌다. 지도 작성에 있어서도 정상기(鄭尙冀 : 1679~1752)의 〈동국지도 東國地圖〉에 보이듯이, 울릉도와 우산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국경도 가늠하게 되었다. 1714년(숙종 40) 강원도어사 조석명(趙錫命)의 보고에 "울릉도 동쪽으로 도서가 잇달아 있고 이 섬들은 왜경(倭境)과 접하게 된다"고 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독도, 즉 마쓰시마[松島]에 관한 기록인 사이토[齋藤豊仙]의 〈은주시청합기 隱州視聽合記〉에 "일본의 서북경은 은주(隱州 : 隱岐)로써 한계를 삼는다"라고 한 것과 부합된다. 이처럼 17세기 말엽 이후 조선측의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지식이 확대되어간 반면, 일본측은 위축되어갔다. 그 까닭은 막부의 도해금지령에 따라 일본 연해민들의 울릉도 왕래가 거의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해민들의 울릉도 왕래가 재개되는 19세기 중엽(일본에서는 바쿠후 말기~메이지[明治] 초기에 해당)에 이르러서는 도명(島名)상의 혼란도 일어났다. 다케시마[竹島 : 울릉도]가 마쓰시마[松島 : 본래는 독도에 대한 호칭]로, 오늘의 죽도[竹嶼]가 다케시마로 호칭되었는가 하면, 독도에는 량고시마[リャンコ島]라는 서양식 이름이 붙여졌다.

독도문제

일본인들의 울릉도 왕래가 재개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이지만, 그것이 조선측 수토관에 의하여 확인된 것은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서였다. 이에 조선측에서는 일본 외무성으로 서계를 보내어 항의하는 한편, 부호군(副護軍)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檢察使)에 임명, 현지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개척여부의 조사를 겸한 것으로, 이제까지의 공도정책의 수정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검찰사 이규원은 1882년 울릉도를 검찰하고 돌아와 그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그 요지는 개척이 가능하며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에서는 울릉도 개척을 결정하고 다음해부터 희망자를 모집하여 입거(入居)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민호(民戶)가 불어남에 따라 1895년초에는 약 200년간 계속되어 오던 울릉도 수토제도를 폐지하였고, 이어 도감제(島監制)를 설치하여 도민 중에서 도감을 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울릉도에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광무 4) 내부시찰관(內部視察官) 우용정(禹用鼎)이 현지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의 일이다. 정부는 우용정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해 10월 칙령 제41호로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을 제정·반포하였는데, 주목되는 것은 울도군의 관할구역으로 울릉전도(鬱陵全島)·죽도(竹島)와 함께 석도(石島)를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도는 지금의 죽도[竹嶼], 울릉 '전도'는 울릉도와 이에 부속된 섬과 암초의 통칭이며, '석도'는 독도를 가리킨다. 석도를 훈독(訓讀)하면 '독섬' 혹은 '돌섬'이 되는데, 지금도 울릉도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이라 부르고 있다. 1906년(광무 10) 4월초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의 보고서에 "본군소속 독도가 재어외양(在於外洋) 100여 리에 이삿더니……" 운운하고 있는데, '독도'는 독섬, 즉 석도에서 차음(借音)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칙령 제41호는 대한제국 정부가 독도를 그 판도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한다.

일본 메이지 정부도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를 반포하기 이전부터 량고시마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전쟁중인 1905년 2월 돌연 량고시마를 다케시마로 명명,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로 그 영토를 편입시켰다. 그것은 일본의 국운을 걸었다고 하는 '동해해전'(東海海戰)을 얼마 앞둔 시기로 대(對)러시아 전쟁 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영토편입 고시절차가 비밀스러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국측이 일본의 독도영토 편입을 알게된 것은 1906년 4월초였다.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은 이해 5월 20일자 지령 제3호를 통하여 독도의 일본영토 편입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뒤의 한·일 양국 간 독도영유권과 관련된 교섭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하여는 한국 정부의 외교권이 1905년 11월부터 일본에 접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처/宋炳基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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