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어느 날 평양 모란봉. 16살의 꿈 많던 한 소녀에게 일본 군인이 다가왔다. 온갖 달콤한 꾐에 빠진 소녀는 강제로 배에 태워져 싱가포르로 보내졌다. 또래의 다른 한국 소녀들과 군용 트럭에 실려 도착한 곳은 일본군 주둔지. 이때부터 소녀의 꽃다운 청춘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소녀의 꿈’은 사라지고, 어두운 암흑의 고통이 뒤덮었다. 소녀는 그 뒤 이역의 땅 중국과 만주의 일본군 주둔지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화선 할머니 이야기다. 김 할머니는 짓밟힌 청춘에 대해 일본의 공식 사죄 한마디 듣지 못한 채 13일 86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가슴에 품은 한은 어떡할꼬.” 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김 할머니와 ‘나눔의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할머니들은 내내 눈물을 훔쳤다.

김 할머니의 한평생은 멍든 삶이었다. 1945년 8월 일본 패전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귀국길에 오를수 없었다. 몸을 더렵혔다는 자격지심이 그를 움츠러들게 했다. 일본에서 닥치는 대로 험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1947년 군함을 타고 가까스로 그립던 한국 땅을 밟았지만 차마 고향에 갈 수도 없었다. 김 할머니는 서울, 부산, 인천 등지를 떠돌며 보따리 행상을 하다 결국 대전에 정착해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살았다. 2008년 11월에야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에 들어갔다

나라를 잃어 삶을 짓밟혔던 김 할머니. 후대에는 나라 잃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행상으로 조금씩 모은 돈을 가난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기부했다. 2009년에는 “캄보디아 생명의 우물 사업에 써달라”며 고이 간직한 70만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평생 봉사의 삶을 사셨어요. 그동안 민간단체를 통해 세계 빈곤지역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기부를 해왔습니다.” 나눔의 집 자원봉사자 김선주(37·여·광주시 퇴촌면)씨의 회고다.

빈소가 차려진 경기도 광주 장례식장에는 김 할머니와 가깝게 지내던 박옥선(88)·이옥선(84) 할머니 등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오열하고 있었다.

“남을 위해 가진 것 모두를 베풀었던 천사 같은 마음의 화선이가 세상을 떠났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없는 일본 정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가하곤 했던 박 할머니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김 할머니의 영정을 바라보고 힘없이 쏟아낸 말이다.

김 할머니의 장례를 주관하는 나눔의 집 부원장 호련 스님은 “위안부 할머니들은 살아 있는 역사교과서”라며 “일본 정부는 왜곡된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유례없는 전쟁범죄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법적 배상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과 트위터에는 김 할머니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넘쳐 흘렀다. “할머니, 하늘의 천사들과 행복하시길 빕니다.”(@halee****) “못된 인간 없고 아픔 없는 세상에서 편안히 쉬세요.”(@songtea****)

김 할머니의 별세로 광주 나눔의 집에 머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8명으로 줄었다. 전국에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는 이제 60명뿐이다. 15일 출상을 하는 김 할머니는 나눔의 집 수련관 3층 법당에 모셔진다.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