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 휘 / 그림 문 악 보

제1장- 우해(于海)

1.1 괴 군사

시각이 어떻게 되었을까. 한밤 중 서라벌 금성 북문 누각에 오른 실직주(悉直州) 군주 청년장수 김 이사부(金 異斯夫)의 귀에 문득 말발굽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발굽소리는 괴괴한 정적을 타고 멀리 북쪽하늘 끝에서 아스라이 달각거렸다.

가끔은 바람에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겹쳐 환청을 만들 때도 있어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야릇한 소리 속에 실낱같이 섞여 들려오는 편자 쇳소리를 알아듣고 나서야 이사부는 큰 귀를 더욱 쫑긋 세웠다. 무슨 일인가?

이사부는 소리가 나는 북쪽을 향해 버티고 서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뒤 단전에 힘을 주어 통견원문술(通見遠聞術)을 걸었다. 들려오는 소리의 진원은 분명 바람이나 나뭇잎이 아니었다. 소리는 아직 아득했다.

연유를 알 길이 없는 께름칙한 느낌이 시작된 것은 왕에게 대략 마무리돼가는 하슬라주(阿瑟羅) 설치를 위한 과업들을 세세히 보고한 뒤 궐을 나선 다음부터였다. 대궁을 나오는 걸음에 전쟁터를 함께 누볐던 강현(剛玄), 상탁(象卓), 부항(斧恒) 등 시위부 부장들을 만났다. 그들과 전장에서 함께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가며 어울린 초저녁 때부터 기분이 뒤숭숭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런 야릇한 기운은 늦은 밤 본가에 돌아와서도 내내 이어졌다.

아침이면 실직성으로 돌아가야 할 참이었다. 심상찮은 기운으로 마음이 한껏 흐려져 있었다. 자리에 누웠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오밤중에 바람을 쐬면 좀 나아지지 않으랴 싶은 마음에 집을 나서서 성곽을 따라 순찰을 돌듯 한 바퀴 돌던 발길이었다.

성곽 둘레 길을 걷는 동안 북쪽 지평선 쪽에서 뜬금없이 야광귀(夜光鬼)를 보았다. 어느 길섶에서는 그슨대가 두 번이나 나타나 같잖은 수작질을 벌이기에 안광으로 베어버렸다. 그러던 걸음 끝 북문에 이르러 멀리서 들려오는 이상한 쇳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단전을 풀었다. 날숨을 길게 뱉으면서 하늘을 보니 별이 초롱초롱했다. 밤바람 속에 묻어오는 솔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영락없이...또다시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서라벌의 솔향기는 실직주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동해 바닷가에서 맡는 해송 향기에는 바다 냄새가 촉촉하다. 그러나 서라벌의 솔잎향기에는 송진 냄새 속에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 있다. 처음에는 그 냄새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라벌 소도제단 무사로 있던 동도(童徒) 시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피 냄새가 처음 느껴진 것은 아버지 아진종(阿珍宗)이 말갈족과의 실직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난 다음이었다. 소도제단에서 비보를 듣고 말을 때려 부랴부랴 달려온 집에는 어머니 보옥(寶玉)공주 김 씨마저 울다가 자지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실직성에서 서라벌 본가로 옮겨진, 죽은 아버지의 부은 얼굴은 온통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전투 중에 독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했다. 시퍼렇게 독이 퍼져 굳어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찰나, 불현듯 피 냄새가 밴 솔향기가 물씬 코를 찔렀다. 그때부터였다. 서라벌의 바람 속 솔향기에서 피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마복칠성(磨腹七星)의 하나로 지명된 이사부는 평도(平徒)가 되자마자 일개 서당(誓幢)을 지휘하여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을 복속했다. 점령지 미리미동국 땅에는 추화군(推火郡)이 설치됐다. 그 전공으로 부친이 생전 마지막으로 지키던 실직성 군주로 임명되었다.

실직성에서, 이사부는 그곳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내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서라벌 왕의 친족이면서도 변방을 나돌다가 끝내 명을 다한 아비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쓰러졌던 어머니는 목숨을 건진 대신에 시력을 잃었다. 눈을 떠도 온갖 사물이 그림자로만 보인다고 했다. 워낙 금슬이 좋은 양친들이긴 했다. 그랬어도, 어머니가 왜 눈이 멀도록 아버지의 죽음을 극심하게 애통해 했는지 이사부는 깊이 알지 못했다.

*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문을 열어라!”

이사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성문 안쪽을 지키고 있던 초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밤중, 성 앞에는 아무것도 다가오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성문을 열라하는 장군의 명을 괴이쩍어 하는 눈빛들이었다.

“성문을 열라 하시었나이까?”

초병 하나가 확언을 듣자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삼십 리 밖에 척후가 오고 있다. 발굽소리에 긴박이 묻어있구나. 어서 성문을 열라!”

여섯 척 장수 이사부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누각을 울렸다. 초병들은 영차영차 소리를 내어 안쪽에 가로 걸린 우람한 장목을 벗겨 들어내고, 삐걱 소리를 내며 육중한 성문을 열었다. 이사부는 허리춤에 걸린 환두대도를 철럭거리며 느릿느릿 누각을 내려갔다.

척후의 말은 빨랐다. 이사부가 성문 앞에 나가 기다리고 서 있는 동안 말발굽소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별이 무성했다. 봄이었으나, 진달래와 나리꽃이 서둘러 피는 것 말고 계절은 모든 게 일렀다. 밤바람에 묻어오는 냉기가 새삼 진저리를 만들었다.

기운이 점차 커지는 서라벌의 치세에 고구려 연접 변방의 긴장이 극해지기 시작한 세월이었다. 스물두 번째 임금인 지대로왕(智大路王)은 여덟 해 전, 그러니까 즉위한지 네 해째 되던 계미년에 드디어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해 만방에 고했다. ‘신라’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을 거쳐 ‘마립간’으로 불려오던 통수의 칭호도 ‘왕’으로 바꿨다. 지방에는 주와 군, 그리고 현을 차례로 설치하여 나라의 틀을 든든히 다졌다. 서라벌은 이제 한낱 사로국(斯盧國)이 병합하여 움켜 쥔 진한(辰韓) 열두 나라의 느슨한 집합체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세 번째 임금이었던 유리(儒理)이사금이 펼친 온후한 통치가 민심을 얻고 뭉쳐낸 바로 그 씨앗이었다. 유리 이사금은 순행 중에 얼어 죽게 된 한 노인을 보았다. 이사금은 그 참상을 치자로서 백성을 잘 보살피지 못한 증좌라 여겨 크게 반성했다. 치세의 도를 깨친 유리 이사금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늙고 병든 이들을 구제했다. 그 이후 눈물로써 충성을 맹세하는 백성들이 날로 늘어나 서라벌은 융성했다.

이윽고 저만큼에서 미명을 뚫고 척후가 탄 말이 모습을 드러냈다. 척후의 등에는 붉은 깃발이 비껴 꽂혀 있었다. 왈각거리는 발굽소리에 화급이 그득했다. 이사부는 달려오는 말을 막아섰다.

“멈춰라!”

척후는 말발굽이 채 멈추어서기도 전에 잔등에서 뛰어내려 읍했다. 쉬지 않고 달려 온 군사의 숨소리가 탁했다.

“큰일 났습니다, 장군!”

“무슨 일이냐?”

척후는 한 차례 거친 숨을 고르느라고 말을 바투 잇지 못했다.

“수상한 군대가 발견됐나이다.”

“어디에서 보았느냐?”

“퇴화군(退火郡) 북쪽 종남산(終南山)이옵니다.”

종남산이라면 서라벌에서 지척이다. 가슴이 가볍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이 은밀히 침투를 한 게로구나...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병력은 얼마나 되더냐?”

“못돼도 기백은 될 법한 병사들이 열 두 폭포 위쪽 숲속에 은거하고 있사옵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 가는 바는 없더냐?”

“고구려군 복색은 아닌 듯 했사옵니다.”

“변복을 한 게지.... . 언제 처음 보았느냐?”

“어제 해질 무렵이었사옵니다.”

이사부는 척후가 가져 온 급보를 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낯선 복색을 한 기백의 병사들이 서라벌 지척에 은거해 있다? 아무래도 동맹국 백제는 아닐 것이다.

열아홉 번째 임금 눌지(訥祇)마립간 열네 번째 해에 서라벌은 백제 비류왕(比流王)과 동맹을 맺었다. 스무 번째 임금 자비(慈悲)마립간 열일곱 번째 해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략하여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죽이며 한강유역을 차지했을 때 서라벌은 일 만의 구원군을 보냈다. 또 스물한 번째 임금 소지(炤知)마립간 두 번째 해에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여 일곱 개의 성을 점령하고 미질부성까지 진출하여 서라벌을 위협했을 때 백제는 신라를 도와 고구려의 공격을 함께 막았다. 더욱이, 소지 마립간 열네 번째 해에는 백제 동성왕(東城王)이 신라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과 혼인한 이래로 두 나라는 동맹국으로서의 예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침탈을 방비하는 일에 여념이 없는 무령왕(武寧王)이 그런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변복한 고구려 병사이거나 도적질을 일삼는 말갈족 잔당이 아니고는 짐작해볼 여지가 따로 있지 않아 보였다.

“대궁(大宮)으로 가자.”

이사부는 척후를 뒤따르게 하고서 궁궐로 향했다. 뒤 쪽에서 초병들이 다시 삐걱 소리를 내며 성문을 닫았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왕은 거구를 흔들며 노기를 품은 목청으로 하문했다. 왕의 침전 앞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이사부는 상체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밤잠을 설친 왕의 표정은 그러나 심하게 어둡지는 않았다.

시위부를 총괄하고 있는 원종(原宗)왕자가 왕의 곁에서 커다란 몸을 곧추세운 채 찢어진 눈을 세로로 치떴다. 잠이 덜 깬 부스스한 눈이었다.

“예. 종남산 열두 폭포 위 그 안쪽에 복색으로는 어느 나라 군대인지 알 수 없는 기백의 수상한 병사들이 운집 은거하고 있다 하옵나이다, 폐하.”

이사부는 그렇게 답하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뒤 쪽에 부복한 척후가 턱을 달달 떨고 있었다.

“불순한 병사들이라.... . 아무래도 산맥을 타고 잠입해 내려온 고구려 침투병력이 틀림없으리로다. 출정하여 섬멸함이 옳을 터.”

“그러하옵니다, 폐하. 저들이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쳐부숨이 가할 줄 아옵니다.”

왕은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사부는 왕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신라의 주력군들은 지금 국경 쪽으로 집중돼 있고, 서라벌 금성에는 외곽경비를 맡은 일부 병사들과 시위부 군사들밖에 있지 않았다.

“실직주 군주 김 이사부 장군은 즉시 군사들을 이끌고 나아가 저들을 쳐부수라. .... 병력이 얼마나 필요하겠느뇨?”

왕은 병력의 크기를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끝에 이사부가 대답했다.

“시위부 군사 삼백과 실직주 군사 이백 등 도합 오백을 동원하겠나이다.”

“오백이라.... . 좋다. 그리 하도록 하라. 출병채비를 마친 다음, 곧바로 떠나라. 반드시 저들을 소탕하고 그 정체를 밝혀오라.”

“알겠나이다, 폐하. 소장이 나아가 산중에 출몰한 괴 병력들을 섬멸하고 저들의 실체를 낱낱이 캐내어 오겠나이다.”

이사부는 굳센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다음 절을 올렸다.

“승전하고 오라.”

왕은 그렇게 짧게 말하고는 침소로 들어갔다.

궁궐 문 앞에는 기별을 받은 시위부 휘하 장수들이 달려와 있었다. 평소 몸에 익힌 영대로 이미 완전무장을 한 그들은 모두 미리미동국 정벌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이사부와 함께했던 무장들이었다.

시위부 수장 원종 왕자가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강현 부장은 휘하 군사들 중 날랜 군사 삼백으로 출정채비를 갖추라. 상탁 부장과 부항 부장은 궁성에 남아서 수비임무를 강화하되 동서남북 각 성문 경비대를 즉각 비상대형으로 변경하라. 새로이 구성되는 출정군의 병참지원을 맡을 후군 편성에 만전을 기하라.”

장수들은 일제히 읍하여 원종 왕자의 명령을 복창하고는 흩어졌다.

이사부는 뒤에서 엎드려 떨고 있던 척후에게 임무를 주었다.

“너는 지금 즉시 실직성으로 달려가 중군장 무덕(武德)에게 군사 이백과 함께 종남산 남쪽 열두 폭포 앞 평원으로 긴급 출동하여 본대에 합류하라 이르라.”

척후가 몸을 앞으로 크게 굽혀 읍하면서 명령을 복창하고는 부리나케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바삐 돌아선 자리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겨왔다.

이사부는 사촌지간인 원종 왕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원종 형님. 소장 기필코 저들을 쳐부수고 정체를 밝혀오겠나이다.”

원종 왕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알듯 말듯 야릇한 냉기가 흘렀다.

“그래. 반드시 저들을 도륙하고 실체를 알아오너라.”

원종 왕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몇 차례 끄덕거린 뒤 거구를 건들거리며 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부는 왕자가 남긴 공간에 희미하게 남은 찬바람을 보았다.

불현듯 피로가 몰려왔다. 이사부는 병사들이 출정채비를 할 동안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시위부 별채로 향했다. 그 사이 날이 희붐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는지, 하늘에 뜬 별들이 아득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김(金)씨 성을 가진 지대로왕은 습보(習寶) 갈문왕(葛文王)과 눌지왕(訥祗王)의 딸 조생부인(鳥生夫人)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왕은 열일곱 번 째 임금 내물(奈勿)마립간의 증손이며 스물한 번째 임금 소지 마립간의 재종(再從)이다. 소지 마립간이 후사가 없이 사거한 이후 예순 넷 들던 그 해에 마립간 자리를 물려받아 등극했다. 왕은 무려 여덟 척의 거구였다.

시위부 별채 처소에서 잠시 눈이라도 붙이고자 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의식이 더욱 또릿해지고 있었다. 출정에 관한 이러저러한 상념들이 들끓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과의 조우에서 대응은 또 어찌해야 할 것인지 궁리에 궁리가 꼬리를 물었다. 머릿속에서 온통 쇳소리가 났다.

문틈으로 여명의 빛이 스며들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사부는 대궁(大弓)을 챙겨들고 시위부 별채를 나섰다. 날이 밝는 속도에 맞춰서 하늘의 별빛이 흐려져 갔다.

궁궐 뒤뜰 사장(射場)은 적막이 깊었다. 사대에 올라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손가락에 각지(角指)를 끼고 손때가 묻은 활을 들어 올리면서 심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과녁을 향해 빈 활시위를 힘차게 당겼다. 막막각궁(莫莫角弓)의 힘이 전율이 되어 찌르르 하고 전신에 퍼졌다. 바람을 찬찬히 읽으며 눈을 떴다. 활은 과녁을 정확하게 향해 있었다. 손가락을 놓으니 빈 시위가 핑 하고 울었다.

화살 통으로부터 신우대 화살 하나를 집어 들어 오늬를 먹이면서 다시 거궁(擧弓)했다. 단전에 힘을 모으고 시위를 당겼다. 과녁이 눈앞으로 달려 나왔다. 한 복판 검은 동그라미 중심을 향해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순식간에 날아가 탕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과녁 정 중앙에 꽂혔다. 관중(貫中)의 희열이 먹물처럼 온몸에 퍼졌다.

이사부의 활시위는 일획(一劃)을 다 쏘고 나서야 울음을 멈췄다. 단 한 발의 살도 벗어나지 않고 힘차게 관중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언제나 그러하듯, 마음을 다잡는 데는 사대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었다.

*

아무리 서둘렀어도 출병준비는 한나절이나 걸렸다. 군대가 궁성을 떠난 것은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잰 걸음으로 내닫지 않으면 일몰까지 숙영 예정지에 닿지 못하리라 저어되었다.

쉬지 않고 달렸다. 말을 탄 장수들을 따라 창과 칼과 활을 비롯한 갖가지 무기를 든 군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군대의 뒤 쪽으로는 병참물자를 실은 수레들이 부리나케 따랐다.

퇴화군으로 가는 길목 음즙화현(音汁火縣) 길가에는 하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군대의 긴급출동에 놀란 백성들이 구경을 나왔다. 길가에 나선 민초들의 표정에는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도읍지에 연접해 살던 사람들에게 수백의 군사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화급히 출동하는 일은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대열의 앞쪽에서 말을 타고 달려가는 이사부의 심경은 착잡했다. 기백의 군사라 했으나 산중에 은거하고 있는 군사들의 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 수가 몇 백을 헤아릴 지, 어쩌면 수천에 이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병법에는 산 위에서 버티는 군사를 공략하려면 적어도 병력이 세 곱절은 돼야 승전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다. 어쩌면 오백으로서는 어림없는 노릇일 지도 모른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퇴화군을 거의 다 지나 저 만큼 아득히 종남산 꼭대기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이사부는 강현 부장에게 숙영지 구축을 명했다. 달려 온 길이 얼마나 고됐던지 병사들은 벌판에 하나 같이 널브러진 채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성에서 지어온 주먹밥과 마실 물을 분배하는 병졸들이 밥 소쿠리와 물동이를 들고 군사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군사들은 밥보다도 물을 더 많이 먹었다.

-연재 2회로 이어집니다-

<註>

* 실직주(悉直州, 삼척 일원) * 통견원문술(通見遠聞術, 멀리에서 보고 듣는 신통력) * 하슬라(何瑟羅, 강릉 일원) * 시위부(侍衛府 궁성수비대) * 야광귀(夜光鬼, 신발을 훔쳐간다는 잡귀의 일종) * 그슨대(도깨비과 정령) * 동도(童徒, 소년 낭도) * 마복칠성(磨腹七星, 제 21대 왕 소지마립간의 마복자 7명) * 평도(平徒, 청년 낭도) * 서당(誓幢, 사단규모 군 단위) *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밀양 일대에 있던 고대국가) * 지대로왕(智大路王, 지증왕智證王) * 계미년(癸未年 AD503) * 新羅=‘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덕업일신德業日新), 사방을 망라한다(망라사방網羅四方)’ *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泥師今)->마립간(麻立干)->‘왕(王)’* 사로국(斯盧國, 경주 일원에 위치했던 소국, 신라의 전신) * 퇴화군(退火郡, 흥해 일원) * 종남산(終南山, 내연산內延山의 옛 이름) * 미질부성(彌秩夫城, 흥해 일원) * 이벌찬(伊伐湌, 신라 관위 17등급 중 으뜸등급) * 원종(原宗, 지대로왕의 큰 아들, 훗날 스물세 번째 임금 법흥왕) * 재종(再從, 육촌) * 대궁(大弓, 큰활) * 사장(射場, 활터) * 일획(一劃, 10순, 50개의 화살) * 음즙화현(音汁火縣, 안강 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