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우산국을 정벌하다 -제2회-

제1장- 우해(于海)

1.2 종남산

이사부가 말에서 내려 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났을 무렵 전방으로부터 척후가 달려왔다. 척후의 말 잔등에는 사내 한 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말을 내린 척후가 이사부 앞에 읍했다. 사내는 나이가 제법 많아 보였다.

“적정은 어떠하냐?”

이사부가 척후에게 물었다.

“운집해 있을 따름,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나이다.”

“함께 온 자는 누구냐?”

“종남산에 운집한 괴 군사들을 보았다는 농부이옵니다.”

“괴 군사를 보았다?”

“그러하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염탐을 하러 마을에 내려왔을 때 맞닥트렸었다고 하옵니다.”

이사부는 척후 옆에서 엎드려 떨고 있는 사내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디에 사는 누구시오?”

사내는 쉰 쯤 되어 보이는 농투성이였다. 의복이 남루하고 주름이 검고 굵었다. 벗은 손발도 험했다.

“예. 종남산 아래 갑천계곡 초입 마을에 사는 창천이라고 하옵니다요.”

“산에서 내려 온 자들은 언제 보았소이까?”

“이틀 전 쯤 됩니다요.”

“몇 명이었소?”

“제가 본 병사들은 모두 아홉 명이었습니다요.”

“행색은 어떠하더이까?”

“사람들 얼굴모습은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요. 하지만, 몇몇은 검붉은 군복을 입어 우리 신라군 복색과 크게 달랐고, 손에 든 병장기도 아주 다른 것 같았습니다요.”

“병장기가 어떻게 달랐소?”

“창과 방패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칼은 휘어져 있었으며 쇠가 무척 얇고 가늘어 보였습니다요.”

그렇다면 고구려의 병장기는 아니지 않는가? 고구려의 병사들이라면 최소한 장창이나 부월을 들었어야 옳다. 이사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놈들은 어디에서 온 자들인가? 그들이 침투한 목적은 또 무엇인가?

“그래,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돌아갔소이까?”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요. 그저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장(醬)을 좀 달라 해서 가져갔습니다요.”

“주로 무엇을 묻더이까?”

“근처에 신라 병사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요. 하지만 저희들은 흙이나 파먹고 살아가는 농투성이들이라 군대에 관해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습지요.”

“그것뿐이오?”

“예. 그것뿐입니다요.”

창천이라는 늙은 농부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성글게 난 수염이 앙증맞아 보이는 그의 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이사부가 입을 열었다.

“갑천계곡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마을사람들에게 곧 도성에서 오천 대군이 들이닥친다고 이르시오. 가능하면 이웃마을에도 소문이 전해지도록 하시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소?”

이사부의 말에 농부는 어리둥절해서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더듬더듬 되뇌었다.

“오천.... 대군... 이라굽쇼.....?”

이사부는 척후를 향해 말했다.

“농부를 마을까지 데려다 주어라.”

“명 받들겠나이다.”

척후가 다시 읍을 하며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긴장하여 얼이 반쯤 빠진 사내를 재촉하여 말 잔등 뒷자리에 태워 떠났다.

그 사이 숨을 좀 돌린 병사들은 뚝딱거리며 부대별로 막사를 세우느라고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해가 짧았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숙영지 동북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한 무리의 군대가 보였다. 실직주 중군장 무덕이었다. 군사들을 인솔하고 온 무덕이 달음박질치듯 이사부에게 다가왔다.

“군주님! 소장 하명을 받고 한 걸음에 달려왔나이다.”

“바삐 오느라고 수고했다. 실직성에는 별고 없느냐?”

“예. 아무 일 없사옵니다. 국경 쪽도 조용하옵니다.”

이사부는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인 다음 호위군사들에게 말했다.

“군의를 열 것이다. 장수들을 불러라.”

호위군사 중 하나가 허리춤에서 중각(中角)을 꺼내어 사방으로 돌려가며 뿍뿍 불었다.

진영 구축을 지휘하던 부장들은 한걸음에 달려와 읍으로 예를 갖춘 뒤 이사부 앞에 둘러앉았다. 출병이 급하여 수하들에게 적정이나 임무를 제대로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종남산에 운집한 괴 병력의 정체가 고구려군일 것으로 우선 판단했으나, 이어지는 첩보로 미루어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적정을 잠시 더 살핀 다음 전략을 정해 진격할 것이다.”

장수들은 모두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알겠나이다. 장군.”

“지금까지 입수된 첩보로는 적병의 실체는 물론 그 규모조차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단지 은닉하고 있는 군사들이 기백은 될 것이라는 짐작 하나 뿐이다. 만에 하나, 저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많을 경우에는 낭패도 예상된다. 제장들의 의견을 듣고자 한다.”

장수들은 잠시 술렁거렸다. 말문을 먼저 연 사람은 강현 부장이었다.

“소장 강현이 먼저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적들이 고을을 염탐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거짓 정보를 더욱 흘려 적들의 심사를 흔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되옵니다.”

이번에는 다른 부장 하나가 나섰다.

“소장 한 말씀 아뢰겠나이다. 강현 부장의 말씀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장의 판단으로는 적군의 규모가 가늠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리한 공격전은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따라서 일단 저들을 폭포 위로 몰되 종남산 너머 북으로 퇴로를 열어주고, 북로 실직주나 하슬라에서 아주 잡는 것이 가할 것으로 여겨지옵나이다.”

장수들의 의견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이사부가 말했다.

“옳은 말이다. 내일 날이 밝으면 적정을 더욱 면밀히 살핀 연후에 공략할 방도를 정하고 작전을 세우겠다. 그러기 전에 척후와 기발(騎撥)을 늘려 해야 할 일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저들에게 풍문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마을마다 ‘오천 대군이 몰려가리라’는 소문을 풀어 저들의 사기를 흐트러뜨리는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실직주와 하슬라에도 기발 전령을 띄워 가용한 병력을 북로 길목 요지에 매복토록 하여야 한다.”

“명 받들겠나이다. 장군.”

장수들은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수명(隨命)의 예를 갖췄다.

날이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벌판 진영에는 군사들이 서둘러 세운 막사들이 거의 다 모양을 갖추었다. 이사부는 지휘소 막사 숙소에 들었다. 해가 반짝 난 한낮에는 그래도 온기가 있던 공기가 어둑어둑해지면서 꽤나 싸늘해져 있었다.

*

날이 밝자, 이사부는 적정을 살피고자 무덕과 함께 말을 달려 종남산이 잘 보이는 갑천계곡 앞으로 나아갔다. 거리가 워낙 멀기도 하거니와 골이 깊어 은닉한 적을 바로 보아 판단하는 일이 여의치 않았다. 척후들이 돌아와 전하는 보고를 통해 적의 동태를 짐작할 따름이었다.

계곡으로 물줄기를 내려 보내는 열 두 폭포 위 어디쯤에 평평한 모양의 솔숲이 있다고 했다. 얼핏 생각하기에도 그런 지점이라면 부대가 은거하는데 유리한 점이 많을 듯싶었다. 소탕을 위해 정면공격에 나선다 해도 물이 흘러내리는 경사를 위로 거슬러 치고 올라가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지형의 특징을 살펴보니 자칫 무리했다가는 오히려 매복 작전에 역습을 당하기 십상인 심곡이었다. 깨끗한 물까지 풍부하니, 저들이 악착같이 버티자 하면 결코 공략이 수월치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이 출동한 목적이 고작 그곳에 진을 치고 살고자 하는 뜻이 아닌 바에야 서라벌을 기습할 기회를 엿보고 있음이 분명할 것이었다. 변복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 복색이야 그렇다 쳐도, 병장기마저 고구려 것이 아니라 하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할 것인가.

상황으로 보아 굳이 우선순위를 꼽자하면 어쨌든 그들의 정체가 고구려군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신라의 위세를 아무리 허술히 가늠해도 그렇지, 겨우 기백의 변복군사들로 신라국의 심장인 서라벌을 넘보는 짓을 고구려가 꾀하리라는 것은 또한 가당치 않은 추측이었다. 만약 고구려군이 아니라면 도대체 저놈들은 어디에서 온 어떤 자들이란 말인가.

창과 방패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칼은 휘어져 있었으며 쇠가 무척 얇고 가늘어 보였습니다요.... . 괴 군사들을 보았다는 농사꾼의 말을 되새기던 이사부에게 번쩍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왜구? 작금에 해안을 따라 섬나라 도적들이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보고가 부쩍 늘긴 했다. 백성들의 고충을 뻔히 알면서도 긴 해안을 따라 불시에 치고 달아나는 그들의 도적질은 도무지 방비책을 찾기 힘든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근자에 출몰하는 왜구란 한낱 뗏목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조악한 배를 타고 기습해서 논밭에서 곡식이나 털어가는 정도의 좀도둑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백 명씩이나 군대를 조직해서 잠입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괴 군사들의 정체는 변복한 고구려군으로 짐작하는 것이 타당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사부는 종남산을 향해 두 다리를 엉버티고 서서 단전에 힘을 모았다. 그리고는 두 손바닥에 힘을 주어 앞으로 내뻗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갑천계곡 쪽으로 기를 쏘았다. 함께 온 중군장과 호위군사들이 이사부를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사부가 쏘아 보낸 기는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도중에 하얀 물빛과 쏴아 하는 낙수소리만 안고 되돌아 왔다. 다시 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웬일일까? 이사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갑천계곡을 내려오면서 펼쳐져 있는 열두 폭포를 떠올렸다. 그래, 그렇구나. 저 폭포들 때문에 기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오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사부는 다시 한 번 종남산 중턱을 향하여 기를 모아 던졌다. 마찬가지였다. 쏴아 하는 물소리와 흰 물빛 이외에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아니, 그렇다면.... 저 장소를 진지로 택한 자는 혹시 술법을 깊이 터득한 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는 누구인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란 말인가?

전쟁터에서 계곡의 폭포는 성(城)이다. 아니 웬만한 성보다도 오히려 더 튼실한 요새다. 폭포 아래쪽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저 갑천계곡에 폭포가 열둘이나 되니 저만한 요새는 없을 일이다. 이사부는 심호흡을 했다.

“장군!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나이까?”

무덕이 궁금증을 참다못해 물어왔다. 이사부는 엉버티고 서있던 기마자세를 풀었다.

“아니다. 저들의 정체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구나. 그 앞에 폭포가 열둘이나 성이 되어 버티고 있으니 난감한 일이다.”

무덕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일행은 종남산 갑천계곡 입구에서 한참을 더 머문 후에야 본대로 돌아왔다. 밤중에 수비(隨配)들을 동원해서라도 물빛과 물소리를 막아놓고 다시 봐야 할 것인가....말을 타고 돌아오며 이사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

“장군! 종남산에서 척후가 당도했사옵니다.”

한낮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호위무사를 뒤따라 들어 온 척후가 읍을 한 뒤 무릎을 꿇었다.

“종남산의 적들이 갑자기 여러 개의 깃발을 내걸었나이다.”

“깃발을 내걸어?”

“형형색색의 커다란 깃발들을 솔숲 주변에 일시에 세워 걸었는데, 개중에는 글자가 들어있는 깃발도 더러 있으나 육안으로는 무슨 글자인지 확인이 안 되나이다.”

“깃발은 대략 몇 개나 되더냐?”

“아무래도 열 개는 넘을 것 같사옵니다.”

“열 개?”

전장에서 깃발을 내거는 것은 십중팔구 결전의 의지를 다지는 행위로 읽힌다. 그렇다면 저들이 아군의 출정을 알아차리고 결전채비를 하고 있다는 뜻인가? 이사부는 슬며시 몰려오는 긴장을 헛기침으로 눌렀다.

“흐흠. 그래, 알았다. 다시 나아가서 적진을 더욱 면밀히 살피라.”

“알겠나이다. 장군.”

척후가 그렇게 힘차게 읍하고 물러간 후 이사부는 상당한 혼란을 느꼈다. 저들이 누구인지 정확한 정체를 아직 모른다. 가늠되는 군사의 숫자도 어림짐작만 있을 따름이지 정확하지가 않다. 적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은 지형이 워낙 험난하여 접근이 용이치 않다..... . 젊은 날을 연중 전쟁터에서 살고 있는 이사부였지만, 참으로 까다로운 전투현장을 맞닥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잠시 번민에 빠져 있던 이사부는 다시 수하 장수들을 불렀다.

“적진에서 일제히 오색 깃발들을 올려 세웠다 한다. 어찌 보느냐?”

잠시 뜸을 들이고 난 뒤 부부장 하나가 나섰다.

“소장 아뢰겠나이다.”

“말하라.”

“적이 십여 개의 깃발을 내세웠다 함은 전의를 북돋우기 위한 방책인 것으로 짐작되오니 빨리 저들을 공략할 방안을 세워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나이다.”

“서둘러 공략하자는 얘기로구나.”

그러자 강현 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저들이 자신들의 약점을 가리고자 허세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사옵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저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이 가할 것으로 생각하옵니다.”

“음....좀 더 저들의 움직임을 주시하자는 말이고.... . 또 다른 의견 없느냐?”

다른 부장 하나가 입을 열었다.

“소장의 생각으로는 군대를 갑천계곡 안쪽까지 전진 배치하여 적의 동태를 떠보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만.... .”

그러자, 이번에는 잠자코 듣고 있던 중군장 무덕이 나섰다.

“아니 되옵니다. 그렇게 되면 아군의 수가 오백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노출되어 저들의 기세를 올려줄 수 있습니다. 다른 방책을 모색해야 할 줄 아옵니다.”

“제장들의 말이 다들 유용하다.”

이사부는 장수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쟁터에서는 만용이 더러 필요할 때도 있지만, 단 한 번의 섣부른 판단이 치명적인 패퇴를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극명하게 걸린 전장에서 전략전술을 선택하는 것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할 가치가 얼마든지 있는 일이었다.

“적의 동태를 더욱 주시하면서 철저하게 대비하라. 혹여 기습이 있을 지도 모르니 경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알겠나이다. 장군!”

“일단 물러가 명을 기다리라.”

“예.”

장수들은 일제히 읍을 하고 물러갔다.

어지러웠다. 어지러워서 심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사부는 지휘소 막사 안에서 결가부좌하고 앉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양손을 위로 벌려 무릎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단전에 힘을 주었다.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无備 出其不意)...전혀 대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고, 뜻하지 않은 곳으로 출동하라 했던가......결단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오늘 밤 적을 기습할 것이다. 월도, 협도, 장창, 각궁으로 일백의 선봉 별동대를 구성해 앞세우고 본대는 그 뒤쪽을 따르게 하라. 무예가 출중한 자들로 선발하되, 기습에 쓸 횃불도 함께 준비하라. 출동시간은 금일 늦은 밤이다. 별동대는 내가 직접 지휘한다. 중군장 무덕은 별동대 후위를 맡으라. 강현 부장은 본대를 지휘하여 뒤를 따르라.”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다 저녁 무렵 이사부는 지휘소로 장수들을 불러 지도를 펴놓고 은밀히 작전지시를 내렸다. 오후에 다녀 간 척후의 보고에 따르면 적정(賊情)은 깃발만 나부낀 채 미동도 없다했다. 지도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던 이사부는 결국 야간 기습작전을 선택했다. 날이 맑고 달이 눈썹모양으로 커 오르고 있으니 밤하늘이 적당할 것이다.

장수들이 각 막사로 돌아간 다음 밥이 나왔다. 막상 밥상을 보니 비로소 배가 고팠다. 그때에야 이사부는 자신이 허기도 잊은 채 한동안 전략수립에 골몰했음을 깨달았다.

지형지세로 볼 때 주간에 벌이는 정상적인 전투는 무조건 불리하다. 저 위쪽에 있는 군대의 규모를 알 수는 없지만, 열두 폭포로 가로막힌 오르막길을 거슬러 치고 올라간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오백의 군사 모두를 한꺼번에 이끌고 잘못 시작했다가는 소모전만 커질 것이다. 일백의 날랜 군사들로 능선 길을 우회하여 저들의 옆구리를 찌르고 뒤따르는 나머지 본대 병사들로 저들을 쓸어 잡을 것이다.

된장국에 말아 먹는 밥이 새삼스럽게 달았다. 반찬으로 나온 멧돼지고기 구이도 무척 고셨다. 전장에서 밥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니다. 뛰고 달리고 싸워 살아남기 위해서 무조건 먹어두고 보는 것이 밥이다. 작전계획을 끝낸 이사부는 모처럼 맛있는 밥을 먹었다.

*

밥을 다 먹은 이사부는 호롱불을 켜고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산중턱 적진까지 우회하려면 시간이 수월찮게 걸릴 것이다. 어쩌면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동 간 비닉을 위해서 출발부터 말을 쓸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저들이 이 밤에 기습을 하리라는 것을 짐작치 말아야 할 터인데.....그건 하늘에 맡길 일이었다.

“장군. 중군장께서 오셨습니다.”

지휘소 밖에서 호위군사의 목소리가 났다.

“들라 하라.”

지휘소 천막 문을 열고 무덕이 들어섰다.

“장군. 진지는 드셨사옵니까?”

“방금 먹었다. 별동대 편성은 끝났느냐?”

“예. 방금 편성을 끝내고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습니다.”

“어둠이 다 내리면 곧 출동한다. 갈 길이 멀어서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오르막 능선 길을 한참 올라야할 터이니 마실 물을 넉넉히 챙기도록 하라.”

“예. 알겠나이다.”

무덕이 지휘소를 나간 다음 이사부는 곁에 걸어두었던 철편갑주를 챙겨 입었다. 옆구리에 환두대도를 차고 심호흡을 하고나니 비로소 가슴에 싸한 기운이 솟아났다. 전장으로 나아갈 적마다 일어나는,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느껴지는 싸한 이런 기분은 형언하기 힘든 쾌감 같은 것이었다.

*

종남산 갑천계곡을 완전히 우회하여 오르는 등성이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가팔랐다. 잡목이 우거져 새로 길을 내며 나아가는 일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숨소리를 죽인 채 올라야 하는 행군이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평소에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군사들은 끙 소리 한번 안 내고 잘 나아가 주었다. 다행인 것은 예상했던 대로 가까운 곳은 보이고 먼 곳은 잘 보이지 않도록 눈썹달의 밝기가 적당하여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등성이에 올라섰을 때 군사들에게 손짓으로 휴식을 명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산을 오르는 행군은 더디고 또 더뎌 이미 한밤중이었다.

이사부는 저만큼 비스듬히 올려다 보이는 거무스름한 솔숲을 향해 엉버티고 서서 심호흡을 했다. 단전에 힘을 주고 통견원문의 기를 쏘아 보냈다. 밤인데다가 계곡이 보이지 않으니 물빛도 물소리도 방해가 되지는 않으리라. 굳이 수비들을 불러내느라 용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산중턱까지 날아갔다가 돌아 온 기에는 아무런 흔적도 묻어있지 않았다. 인마의 기운도 없었고, 병장기의 기운도 담겨있지 않았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저 숲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인가? 이사부는 다시 한 번 기공을 썼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다시 한 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적장은 통견원문 정도의 술법을 간단히 교란시킬 정도로 대단한 술사인지도 모른다... .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별동대는 적진을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한바탕 필사적인 전투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들은 긴장 속에서 고양이처럼 사뿐히 능선 길을 거푸 올랐다.

*

얼마나 올랐을까. 숲의 전경이 훨씬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아득히 계곡물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사부는 군사들에게 능선 길을 버리고 약간 아래로 내려가 나무 밑에서 나무 밑으로 시나브로 기어서 접근토록 명했다. 이쪽에서 보이는 꼭 그만큼 저쪽에서도 시야가 트일 것이었다. 그렇게 접근해가는 시간은 훨씬 더 많이 걸렸다.

이윽고, 부대는 종남산 중턱 솔숲이 저만큼 내려다보이는 등성이에 들러붙는데 성공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제법 적진에 가까이 닿았을 텐데, 별동대가 나아가는 길목에 저들의 경계병사가 하나도 걸리지 않았다. 온몸에 땀이 흘러 갑주 속에 받쳐 입은 속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하늘의 별빛이 조금 흐릿해진 것을 보니 머지않아 새벽이 올 모양이었다.

숲 주변에 세워 놓은 커다란 깃발들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산바람에 펄럭이는 그 모습이 병사들의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둑한 숲 속에는 여전히 괴괴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본대가 당도하여 별동대 꼬리에 닿을 때까지 계속 살펴보아도 적정은 여전했다.

이사부는 본대가 어느 정도 뒤에 붙자, 일백여 명의 선봉 별동대원들을 뾰족한 삼각대형을 짓도록 지시했다. 앞 쪽에 장창군사들을 세우고, 이어서 월도, 월부, 협도군사들을 배치했다. 맨 마지막에 궁수들을 넓게 포진시켜 앞선 군사들을 엄호하도록 했다.

“절대로 대형을 흐트러트리지 마라. 숲속에서 교전이 시작되면 피아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대오가 무너지면 안 된다. 일단 적들과 조우하기까지는 소리 없이 전진한다. 속도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도록 유의하라. 본대는 별동대를 바짝 따르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일제히 공격하라.”

이사부는 마지막 작전명령을 하달하고는 환두대도를 뽑았다. 그리고는 맨 앞에 서서 대원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살쾡이처럼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나아가고 있는 별동대의 앞 쪽에는 솔향기만 그득할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야릇한 정적이 오히려 공포를 몰고 와서 군사들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다.

숲 속에 들어섰다. 빼곡히 들어찬 소나무 기둥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소나무 이외에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숲 한가운데로 들어 갈 때까지 거치적거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횃불을 밝혀라!”

이사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병사들이 가지고 온 관솔 봉을 검불위에 올려놓고 엎드린 채 부싯돌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관솔횃불이 밝혀졌다. 무덕이 횃불 하나를 들고 이사부에게 다가왔다.

“장군!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도망친 것 같습니다.”

“주변을 뒤져라.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흔적을 살펴라.”

“예. 알겠습니다.”

무덕은 그렇게 대답한 뒤 돌아서서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흩어져서 놈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찾아라. 뭐든지 눈에 띄는 대로 갖고 오라.”

횃불을 든 병사를 중심으로 군사들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숲속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우선 저들이 남기고 간 깃발들을 뽑아서 들고 왔다. 깃발은 기다란 대나무깃대 끝에 매달려 있었다. 결국 저들이 깃발을 내건 것은 도주하기 위한 기만술이었던가. 신라군이 깃발의 정체에 신경을 쓰는 사이에 달아난 게 틀림없어 보였다.

강현 부장이 병사들이 수거해 온 깃발들 중 뭔가 글자가 들어가 있는 두 개의 대형 깃발을 들고 와 이사부의 앞에 펼쳐놓았다.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악한 필체였다. 그 중 하나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우해대왕(于海大王)’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사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아니? 이놈들이 정녕 울릉도(鬱陵島)에서 건너 온 작자들이란 말인가?

이사부가 우산국의 존재를 알기 시작한 것은 여섯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처음 실직주 군주로 임명되어 부임했을 때, 그곳 사람들로부터 하슬라 동쪽 이틀 뱃길 바다 위에 우산국이라고도 불리는 울릉도라는 큰 섬이 있다고 들었다. 뭍에서 나간 어부들이 고기를 잡다가 그 섬사람들과 더러 부딪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것이었다.

두해 반 전 그때쯤에 이사부는 말로만 듣던 울릉도를 탐색하기 위해 동해에 배를 띄우고 나섰었다. 하지만 울릉도로 향하던 중 느닷없이 밀어닥친 풍랑에 파선을 당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이 있었다.

“사방으로 나아가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놈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흔적을 낱낱이 찾아라. 달아난 방향도 알아내라.”

이사부는 군사들을 모두 풀어 수색을 명했다.

병사들은 단서가 될 만한 물건들을 수거해 들고 왔다. 부러진 나무 숟가락 젓가락에 먹다 버린 짠지 따위 밥을 해먹은 흔적까지 모두 주워왔다.

이사부는 땀범벅이 된 투구를 벗고 소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놈들이 고구려군이라면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기 위해 종남산 북쪽 산줄기를 찾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저 ‘우산국’과 ‘우해대왕’ 깃발은 무엇인가. 저 깃발들 또한 저들이 아군을 기만하여 추적을 동해 쪽으로 유도해 따돌리기 위해서 내걸어놓고 간 것은 아닐까.

적의 도주로가 북로산맥인지, 동해바다 쪽인지를 짚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연재 3회로 이어집니다-

<註>

* 중각(中角, 뿔 나팔) * 기발(騎撥, 연락기병) * 수비(隨配, 심부름 귀신) * 울릉도(鬱陵島, 우릉도于陵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