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우산국을 정벌하다 -제3회-

제1장- 우해(于海)

1.3 추격

“장군! 적의 잔병 하나를 잡았나이다.”

한참을 지났을 무렵이었다. 강현 부장이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남루한 사내 하나를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산 정상 쪽에서 내려왔다. 끌려 온 사내는 몸집이 무척 작았다. 그는 한 움큼 상투머리만 남기고 머리를 박박 깎고 있었다.

“어디에서 잡았느냐?”

“정상 부근에 토굴을 파고 은신해 있었습니다.”

이사부 앞에 내동댕이쳐진 사내는 왼쪽 다리 발목이 완전히 부러진 심각한 상태였다.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됐는지 모르지만, 큰 부상을 당한 사내는 스스로 도망쳐 대오를 이탈한 게 아니라면 황급히 달아나던 무리에서 버려졌음이 분명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사내는 무릎을 꿇어 웅크린 자세로 이사부를 향해 공포와 오기가 범벅이 된 퀭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어디에서 온 군대냐?”

이사부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니모 시라나이(아무 것도 모른다)!”

사내는 거친 숨소리가 섞인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소리 속에 자신감인지 허풍인지 모를 독기가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왜인들 언어가 아니냐? 그럼 이놈들이 정녕 바다를 건너 온 왜구였단 말인가?

“바다 저쪽 왜국에서 왔느냐?”

“나니모 시라나이! 나니모 시라나이!”

사내는 거푸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군장 무덕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이미 날이 시퍼렇게 선 수부(手斧)가 들려 있었다. 무덕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사내에게 다가가 부러진 왼쪽다리를 낚아채어 바닥에 가로로 잦혀 눕혔다. 그리고는 이미 반쯤 부러진 발목을 향해 가차 없이 도끼날을 휘둘렀다.

“아아악!”

사내는 고통을 못 이겨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비명을 길게 질렀다. 발이 동강나 잘려나간 사내의 발목에서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살고 싶으면 말하라! 어디에서 왔느냐?”

이사부가 다시 큰 소리로 윽박질러 물었다.

“나니모 시라나이! 나니모 시라나이!”

사내가 다시 한 번 악다구니를 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은 핏줄이 가로세로 불끈 솟아오른 그의 얼굴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무덕이 이번에는 사내의 왼쪽 팔을 잡아 땅에다 내려붙인 다음, 순식간에 그의 손목을 향해 손도끼를 휘둘렀다. 잘려나간 손이 땅바닥에서 잠시 펄떡거리는 것 같았다. 왼쪽 수족을 다 잘린 사내가 피를 뿌리며 자지러지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사나이는 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이 얼마나 높고 처절했던지 밝아오는 새벽공기를 타고 멀리까지 날아갔다가 메아리가 되어서 되돌아왔다.

“살고 싶으냐? 살고 싶으면 말하라. 어디에서 왔느냐?”

“우....우산구꾸에서.....왔으므니다! 우산구꾸에서..... .”

사내는 흙빛이 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우리말을 아는구나. 그래, 우산국이라 함은 동해바다 한가운데 있는 울릉도를 말함이냐?”

“그렇스므니다. 그렇스므니다. 도오까따스께떼구다사이(제발 살려주십시오)! 고쇼다까라다스께데구다사이(제발 살려주세요)!.... .”

이사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대오를 정비하라. 곧바로 추격에 들어간다. 적은 북로산맥이 아니라 동해 쪽으로 갔다. 일차 추격 목적지는 우시군(于尸郡) 해안이다. 종남산 정상을 넘어 놈들을 좇는다. 서두르라!”

장수들은 시끄럽게 소리치며 사방에 흩어져 수색에 열중하고 있던 병사들을 불러 모아 대오정비에 나섰다. 이사부는 벗어두었던 투구를 다시 쓰고 그루터기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산국이라..... . 고기 잡는 어부들이나 몇몇이 모여 사는 것으로 알려진 울릉도가 실상은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어느 새 거기 민생들이 왕국을 세워 나라이름을 따로 칭하고 살았단 말인가. 하긴 오늘날 신라국이 제대로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호족들이 각자 사는 곳에서 나라를 참칭하고 사병(私兵)들을 내세워 왕 행세를 해왔던가를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조그만 섬에 갇혀 사는 인종들이 무슨 수로 힘을 키워 군대를 몰고 뭍으로 나와서 감히 서라벌을 넘보는 엉뚱한 짓을 한단 말인가. 아니, ‘우해대왕’이라 불리는 자는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 같은 발칙한 짓을 도모하는 것인가. 더욱 해괴한 것은 어째서 그들 군대에 먼 바다 건너 왜인이 끼어있는 것인가. ......숱한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사이 날은 아주 다 개어서 하늘이 빠른 속도로 파란색을 더해가고 있었다.

*

우시군에 도달해보니 지난 밤 종남산을 부리나케 도망쳐 내려온 놈들이 해안을 훑고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바닷가 여러 어촌들이 우산국 병사들에게 약탈을 당하기도 했고, 불에 탄 집도 여럿 보였다. 겁에 잔뜩 질린 백성들 가운데 적장 우해를 본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 떼도적의 두목은 아무리 못돼도 키가 일곱 척은 되는 장수였습니다요. 눈은 부리부리한 것이 왕방울만 했고 성정도 포악해보였습지요.”

우시군 해안 마을에서 만난 어떤 노인은 자기가 본 우해의 모습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했다.

“함께 도주하는 병사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더이까?”

“어림잡아서 이백은 넘는 듯 했습니다요.”

“이백이라.... .”

이사부는 쉼 없이 몰아쳐 온 군사들이 우시군 해안에서 잠시 숨을 돌리도록 하고는 장수들을 불렀다. 밤낮을 줄기차게 달려온 추격 길이 워낙 힘들었던지 모두들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놈들이 배를 타고 도망치기 전에 잡으려면 서둘러 따라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직주와 하슬라에 다시 기발 전령을 띄워 산중 매복을 풀고 해안 수색에 나서도록 알려라.”

“알겠습니다, 장군.”

장수들은 읍하여 그렇게 대답하고는 각자 위치로 돌아가 널브러진 병사들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이사부와 장수들은 비로소 퇴화군 군영에서 후군 병사들이 바삐 몰고 온 말을 탔다.

군사들을 다그쳐 해안을 타고 북으로 치닫는 강행군이 계속됐다. 척후들이 교대로 돌아와 적정을 알려왔다. 놈들의 발이 얼마나 빠른지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는 보고였다.

*

군대는 삽시간에 션사까지 올랐다. 그러는 동안 여러 채의 민가가 놈들에게 털려 씨감자와 수수를 강탈당했다는 신고가 있었다. 아무래도 놈들은 어딘가에 배를 숨겨두고 왔을 것이다. 놈들이 그곳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들이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사부는 말을 몰아가면서도 초조에 시달렸다.

깎아지른 절벽이거나 지형이 험한 해안은 우회를 해야 했으므로, 추격이 결코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놈들이 배를 타고 도주하기 시작한다면 사실상 그들을 잡기란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었다. 실직주나 하슬라 모두 해전에 대비한 전선(戰船)구축이 전무한 상태였다. 군사들 역시 해전 경험이 없었다.

이사부가 실직주 군주로 부임하면서 수군(水軍)의 필요성을 예감하고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는 등 준비를 시도해보기는 했었다. 하지만, 북쪽에서 호시탐탐 남진을 꾀하는 고구려군과 말갈족의 도적질을 방어할 대책을 세우는 일만으로도 버거운 나날이어서 수군 양성은 지지부진 미뤄둘 수밖에 없는 과제였다.

얼마나 따라붙었을까, 군대가 막 실직주의 경계가 저만큼 보이는 지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사부의 뇌리에 비로소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산단화(山茶花).... . 그렇다. 벌써 두 해를 넘겨 삼년 째 들어서 있구나. 돌아와서 반드시 거두겠노라고 약조했던 여인이 거기 있었다.

영일 없이 격무에 시달리는 군문의 장수로서 언제부터인가 잠시 아뜩하게 잊혀져간 이름... 산단화는 지금 어찌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잊었다는 말은 참이 아니다. 너무나 소중하여 가슴속에 꼭꼭 묻어두었을 따름, 아주 잊었다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비 현덕(玄德) 어른과 함께 잘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이제 열일곱이 되었겠구나. 그녀는 지금도 나를 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왠지 불길한 느낌과 함께 이사부의 마음이 더욱 조바심을 치기 시작했다.

*

“장군! 전방에서 척후가 왔습니다.”

실직주에 막 들어섰을 때, 앞서가던 무덕이 척후를 데리고 돌아와서 보고했다. 이사부는 말을 멈췄다. 척후가 말에서 내려 예를 갖췄다.

“어떻게 되었느냐? 적의 꼬리는 잡았느냐?”

“예. 하오나 놈들이 막 바다로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바다로 달아날 준비를 하다니, 무슨 이야기냐?”

“실직주 초입 해리현(海利縣)에서 놈들이 해안에 숨겨놓았던 배들을 끌어내리는 모습이 목격되었습니다.”

“해리라고 했느냐?”

이사부에게 해리는 익숙한 곳이었다. 그곳은 바로 산단화가 사는 마을이 있는 현이었다. 이사부는 호위군사가 가지고 있던 대궁(大弓)과 화살통을 넘겨받아 재빠르게 어깨에 멨다. 그리고는 말고삐와 채찍을 사려 잡고는 치솟아 오르는 조바심을 삼키며 우렁우렁 소리쳤다.

“말을 탄 장졸들은 나를 따르라.”

이사부는 명령을 끝내자마자 채찍으로 말 엉덩이를 세차게 때렸다. 이사부의 말이 깜짝 놀라 히히힝 긴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내달았다. 중군장과 일부 호위군사들을 비롯한 말을 탄 장졸들이 이사부의 뒤를 앞 다투어 쫓았다. 앞장서야 할 척후가 오히려 그 뒤를 따랐다. 모두 다 해서 열 셋이었다.

저들이 배를 타고 뜬다면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만 것인가? 왕께서는 저들을 반드시 멸하고 정체를 밝혀오라 하셨거늘.... . 놈들을 여기 동해 바닷가에서 영 놓치고 마는가? 안 될 일이었다.

이사부는 어금니를 앙 다문 채 말채찍을 휘둘렀다.

*

척후의 말대로 우산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괴 군대는 아득히 해리현 상단 해안에서 무리지어 바닷물 쪽으로 배들을 막 밀어 넣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세어보니 모두 네 척의 군선들이었다. 우산국 군선들은 하나같이 시커멓고 우악스러웠다. 그들을 어찌해보기에는 아직 거리가 너무 멀었고, 아군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맞닥트린다 해도 문제였다. 이사부는 더욱 세차게 채찍을 휘두르며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한참 만에 가까스로 그들이 허둥지둥 달아나던 자리에 도착했을 때는 우산국 군선들은 이미 배를 물에 띄운 뒤였다. 해안에는 타고 온 배를 끌어올려 묶어서 위장해두었던 솔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모래사장에 가장 먼저 달려와 말을 세운 이사부는 저만큼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달아나고 있는 군선들을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어깨에 멨던 대궁을 내리고 화살을 먹여 괴 군선을 향해 시위를 힘차게 당겼다. 맨 뒤의 군선 고물에 서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사부는 지체 없이 화살을 놓았다.

대궁의 시위가 피잉 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고, 화살은 바람처럼 날아갔다. 이윽고 힘차게 날아간 화살은 군선 고물에 서있던 사람의 등허리에 정확하게 꽂혔다. 화살을 맞은 사람이 휘청하더니 맥없이 바닷물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이사부가 두 번째 화살의 오늬를 막 시위에 먹였을 때 뒤따르던 장졸들의 말이 우르르 하고 한꺼번에 백사장으로 몰려들어왔다. 목표물이 유효사거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사부는 멈추었던 숨을 푸우 내쉬며 활시위를 늦췄다. 그리고는 중군장 무덕에게 말했다.

“배를 띄워서 적선 고물에서 화살을 맞고 떨어진 적병을 수습해오라. 가능한 생포해야 한다. 서두르라!”

“알겠습니다. 장군!”

중군장이 힘차게 대답하고는 해안을 따라 달려 나갔다. 그 뒤를 부부장 둘이 바짝 따랐다.

“허어 참.... .”

이사부는 놈들이 달아난 동해를 바라보면서 허탈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근처 높은 바위에 올라 앞쪽 수평선을 향해 기마자세로 버티고 섰다. 눈을 지그시 감고 단전에서 기를 뽑아 올려 손바닥에 모아 수평선 쪽으로 뻗어 방사했다. 파도에 막혀 흐릿하기는 했지만,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는 네 척의 배들이 보였고, 적지 않은 숫자의 병장기들도 느껴졌다.

바다 끝까지라도 쫓아가고 싶었다. 저들을 추격해 모조리 쳐부수고, 왕을 자처하는 우해인지 뭔지 하는 작자를 잡아 왕께 바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우선 당장 그들을 추적할 배가 마땅치 않았고, 군대도 뭍에서만 싸워 온 병사들뿐이었다. 이사부는 난감한 심정으로 바다 저쪽 수평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던 이사부의 뇌리에 문득 다시 산단화가 떠올랐다.

“따르지 말라.”

이사부는 황황히 말을 타고서 수하들에게 그렇게 이르고는 해변을 따라 달려 나갔다.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산단화를 보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던 때가 생각났다.

이사부가 탄 말은 순식간에 멀지 않는 곳, 스무 가구 남짓 살고 있는 맹방(孟芳) 바닷가 어촌에 당도했다. 그런데, 뜻밖으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몇몇 집은 이엉에 불이 붙어 연기가 꾸역꾸역 솟아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어딘가에 꽁꽁 숨었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섬 도적놈들이 여기를 치고 지나갔다는 말인가? 이사부는 한걸음에 산단화가 살던 촌주(村主)의 집으로 향했다.

촌주의 집도 지붕에 불이 붙어 약간씩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을 끄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사부는 말에서 내려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게 누구 없소이까?”

한참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 없소?”

이사부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쳐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산단화 낭자! 어디에 있소? 안에 있는 것이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도 집 안팎에서는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어디로 달아난 것인가? 아니면, 진작 이 집을 비우고 멀리 떠난 것인가? 이사부는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부엌문과 방문들을 열어보았다. 역시 안에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방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이불과 베개만 덩그마니 놓여있었다.

“누구십니까요?”

이사부가 방문을 열고 한참을 살피고 있을 무렵, 뒤에서 웬 중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사부는 얼른 몸을 돌렸다. 삽짝 밖에서 봉두난발을 한 늙수그레한 남자 하나가 머리만 쏙 들이민 채 두려움이 그득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다.

“이 집에 사는 산단화 낭자를 찾아 온 사람이오.”

“신라군 맞습니까요?”

남자는 여전히 삽짝 밖에서 두려움을 덜어내지 못한 눈을 껌벅이면서 물어왔다. 갑주를 챙겨 입고 환두대도를 옆구리에 찬 이사부의 모습을 아래위로 살폈다.

“그렇소. 산단화 낭자는 어디에 있소?”

“산단화 아씨를 아십니까요?”

그러면서 남자는 조심스럽게 삽짝 안으로 한 쪽 발을 들이밀었다. 땅굴 속에라도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남자의 몸은 검불과 흙투성이였다.

“그러하오. 이 집에는 왜 불이 났소? 그리고 산단화 낭자와 현덕 어른은 어찌 되었소?”

그러자 남자는 비로소 경계심이 다 풀렸는지 앞마당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으면서 울부짖듯이 말했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새벽녘에 웬 낯선 도적들이 몰려와서 집에 불을 지르고 양식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요. 세상에 그런 괴상한 놈들은 처음 봤습니다요.”

“산단화 낭자는 어찌 됐소?”

“아, 참 여기 산단화 아씨.... . 아 글쎄, 놈들이 산단화 아씨는 물론 이 동네 처자들을 셋이나 잡아가 버렸습니다요. 이 댁에서도 처음에는 산단화 아씨만 잡아가려고 했는데, 아씨가 아비를 두고 갈 수 없다고 버티자 놈들이 촌주님까지 함께 끌고 가버렸지 뭡니까요.”

남자는 끝내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다. 이사부의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산단화가 해적들에게 잡혀가다니...? 자책감부터 강하게 솟아올랐다. 좀 더 일찍 찾아와 그녀를 거두었어야 옳았던 것인가....씁쓸한 후회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집을 한 바퀴 더 돌아보고 거기를 막 떠나려던 이사부는 여전히 마당에 주저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놈들은 몇 명이나 되더이까?”

“한 이백 명은 족히 될 것 같았습니다요. 대개 우리말을 썼지만, 와까따 다까따 하는 이상한 말을 쓰는 빡빡머리들도 더러 섞여 있었습니다요.”

“알겠소.”

이사부는 그렇게 힘없이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만감에 사로잡혀 잠시 멈칫거리던 그는 집안을 다시 한 번 휘둘러본 뒤 말 잔등에 올랐다.

어느 듯 해가 지고 있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지, 꽤 많은 마을사람들이 삼삼오오 밖으로 나와 종종걸음을 쳤다. 바가지와 물동이에 물을 퍼다 불이 난 지붕에 끼얹느라고 마을은 어느 새 시끌벅적해지고 있었다. 바다 끝 아득한 수평선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아아, 그녀가 저 수평선 너머로 잡혀가고 있구나.

*

병사들이 한창 말뚝을 박고 있는 해리현 바닷가 군영에는 실직주 아장(亞將) 도형(道荊)이 부대를 이끌고 당도하여 이사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조아렸다.

“장군! 노고가 많으시옵니다. 고생해서 예까지 추격해오셨는데 놈들이 그만 바다로 달아나버렸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사옵니다.”

“글쎄 말이다. 폐하께서 놈들을 반드시 일망타진하라 일렀거늘, 이 낭패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모든 게 다 해안을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소장의 허물이오니 송구하기 한량없나이다.”

“아니다. 그게 어찌 아장만의 잘못이겠느냐. 오직 북방에만 적이 있는 줄 알았지, 동해 바다위에서 그런 괴이한 적병들이 출몰해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그나마나 ‘우산국’이라 하고 ‘우해대왕’이라 하는 저들의 분탕질에 대해서 들은 무슨 다른 정보가 있느냐?”

“최근에 저들에 관한 이야기가 해안 마을을 중심으로 종종 들려오기는 했나이다. 그래봐야 왜구들과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우리 어부들과 더러 부딪치거나 이따금씩 해안에 와서 밭곡식이나 좀도둑질해가는 수준이었지, 이번처럼 대규모로 병장기를 들고 움직인 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사옵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옵니다.”

이사부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오늘 밤 안으로 해안마을을 탐문하여 놈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오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궁성으로 돌아가 폐하께 상세히 보고하여 대책을 마련해야할 터이니 서둘러라.”

“예. 알겠사옵니다, 장군. 곧바로 수하들을 시켜서 ‘우산국’과 그 ‘우해’라는 자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올리겠나이다.”

도형 아장은 그렇게 대답하고 지휘소를 물러나갔다.

뒤이어 중군장 무덕이 지휘소로 왔다.

“화살 맞은 적병은 찾았느냐?”

“예. 하오나.... .”

중군장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죽었더냐?”

“예. 가까스로 찾아서 건져내긴 했으나 이미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하온데, 군주님의 화살을 맞고 숨진 자도 왜인이었사옵니다.”

“뭐라고? 이번에도 왜인?”

“예. 틀림없이 그러하옵니다.”

“더 알아낸 게 있더냐?”

“지난 번 산에서 잡은 놈과 달리, 이번에는 몸이 제법 단단한 무사였습니다.”

“무사라...... .”

“무슨 연유로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사오나, 아무래도 울릉도에 왜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듯하옵니다.”

“그런 모양이다. 괴이한 일이로구나...... . 어쨌든 오늘 하룻밤 병사들을 재운 다음 내일 일찍 철수할 것이다. 그만 가서 푹 쉬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군주님!”

무덕이 나간 다음, 이사부는 처소에 앉아 이런 저런 사념에 젖어들었다. 저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왜인들은 왜 울릉도에 들어와 있는가?

밤은 빠른 속도로 깊어져갔다. 바다 쪽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어둠에 비례하여 더욱 커지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사부는 바닷가에 나가 칠흑바다 저쪽 먼 곳을 바라보며 시름에 빠져들었다. 산단화 낭자....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이렇게 무참한 일을 당하도록 그녀를 버려두고 살았다니..... . 마음속에 떠오른 산단화 낭자의 얼굴이 서서히 지소(只召)의 얼굴로 변했다. 안 된다....이사부는 환영을 떨쳐내기라도 할 양으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가슴속에 고여 있던 깊은 슬픔 한 자락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와 천천히 한숨으로 토해졌다.

[제 1장 끝]

-연재 4회로 이어집니다-

<註>

* 수부(手斧 손도끼) * 우시군(于尸郡, 영덕 영해) * 션사(울진蔚珍) * 해리현(海利縣, 근덕 일원) * 고물(배의 뒤쪽 부분) * 아장(亞將, 군주 다음의 장수) * 지소(只召, 지대로왕의 둘째아들 입종왕자의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