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풍미녀(豊美女)

우직이 안내해서 들어 간 너와집 광은 내부가 무척 넓었다. 물건이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상품(商品) 꾸러미들이 양쪽 벽면에 가득 쌓여 있었다. 광 안에 들어서자 명진은 쌓여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키가 큰 중년 남자 하나가 안쪽에서 나타났다.

“아, 우직 형님 오셨습니까?”

친밀한 사이인 듯 그 남자는 우직과 손을 맞잡고 무척 반가워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눈을 자주 껌벅거리는 습성이 있었다. 남자는 우직과 함께 광에 들어선 이사부와 명진을 경계심이 섞인 눈빛으로 살폈다.

“이보게 당충(堂忠). 이 분은 하슬라 저자에서 시전을 운영하는 박이종 전주님이시네. ....인사들 나누시지요.”

이사부가 빠른 동작으로 등짐을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박이종이라고 하오이다.”

그러자 남자도 정중히 인사를 되받았다.

“예. 저는 당충이라고 합니다.”

우직이 그에 대해서 소개를 했다.

“이 사람은 여기 골계에서 도매상을 운영하는 행수라오. 외지에서 들여오는 물건을 우산도 특산품과 교환해주는 일을 주로 하고 있지요.”

당충은 우직의 소개말을 들으며 적이 마음을 놓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잰 걸음으로 광의 입구로 다가가 바깥을 잠시 살핀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돌아왔다. 은밀한 상거래를 하면서 익힌 습성인 것 같았다.

“이 쪽으로 오시지요.”

당충이 광 안쪽에 놓인, 통나무 원목의자로 손님들을 안내했다.

일행은 통나무 의자에 말없이 둘러앉았다.

“그래, 박 전주께서는 무슨 물건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당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사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에서는 얼마나 귀한 물건일지 알 수 없소이다만, 그나마 뭍에서는 특별하게 거래되는 상품들을 골라서 좀 가져왔소이다. ..... 명진아! 어서 등짐을 열어서 물건들을 보여 드려라.”

기다리고 있던 명진이 등짐을 들고 와서 풀었다. 그리고는 건삼과 머리빗, 머릿기름, 옥비녀, 동 거울, 은수저...등등 등짐 속에서 꺼낸 물건들을 그들 앞에 자랑하듯 하나씩 펼쳐 놓았다. 명진이 늘어놓는 물건들을 바라보던 당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역시 여러 물건들 중에서 건삼에 깊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게 인삼이라는 약재지요?”

명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설명했다.

“그렇습니다요. 잘 아시겠지만, 만병통치의 명약입지요. 인삼칠효(人蔘七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요?”

서로 눈치를 보다가 우직이 되물었다.

“인삼칠효라니 무슨 말이오?”

명진은 신이 난 듯 인삼자랑을 늘어놓았다.

“인삼의 일곱 가지 빼어난 효능을 말합니다요. 지금부터 제가 한 번 읊어볼 테니 들어보시지요. ....보기구탈(補氣救脫)이라 원기를 보하고 허탈을 구하고, 익혈복맥(益血復脈)이라 혈액을 보충하고 맥을 회복하며, 양심안신(養心安神)이라 마음을 길러주고 정신을 안정시키고, 생진지갈(生津止渴)이라 진액을 생기게 하고 갈증을 멈추게 하며, 보폐정천(補肺定喘)이라 폐를 보하고 천식을 멎게 하고, 건비지사(健脾止瀉)라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며, 마지막으로 탁독합창(托毒合瘡)이라 독을 배제하고 부스럼을 없애는 등의 탁월한 약효가 있습지요.”

인삼의 효능들을 넉살까지 넣어가며 단숨에 줄줄 외우는 명진의 설명이 하도 달변이어서 이사부가 먼저 속으로 놀랐다. 역시 장사꾼으로 닳고 닳아 들은풍월도 대단하구나, 그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명진의 청산유수 같은 인삼자랑을 들으면서 당충은 건삼을 손으로 들어 짯짯이 살폈다.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보약 중의 보약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이런 귀한 약재를 여기에서 이렇게 보게 되네요. 물목들은 모두 어떻게 되시오?”

“주요 물목으로는 건삼이 스물여덟 근, 머리빗이 예순네 개, 머릿기름이 열한 통, 옥비녀가 일곱 개, 동 거울이 아홉 개, 은수저가 열일곱 벌이고 노리개를 비롯한 잡다한 물건들이 좀 더 있습지요.”

“예, 그렇군요. 그래 이곳 울릉도에서 특별히 바꿔가고자 하는 물건은 따로 있으시오?”

이번에는 이사부가 말을 받았다.

“여기 울릉도에는 우수한 향이 난다고 들었소이다. 그리고 잘 하면 수달피나 진주 같은 것들도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왔소이다만.... . ”

당충의 눈이 반짝거렸다. 뭍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이 마음에 썩 드는 눈치였다.

“귀한 물건들을 다루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니, 수소문해보면 원하시는 물목들을 어렵지 않게 챙길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여기 이 물목들로 은밀히 통문해서 바꿔갈 작자를 찾아봐야지요.”

그런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을 때 창고 바깥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입구 쪽에서 어험 하는 짧은 헛기침 소리가 났다. 이어서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충 형님 계시오?”

사내의 음성을 듣자마자 당충이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피며 물었다.

“아우인가?”

“예. 그렇습니다.”

당충은 닫아걸었던 안쪽 빗장을 벗기고 문을 열었다. 문 바깥에는 덩치가 제법 큰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광으로 들어서는 사내의 얼굴을 보니 검고 구불구불한 턱수염이 푸짐했다. 그러나 결코 천박한 용모는 아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당충은 다시 문을 닫아 빗장을 걸었다. 사내는 안쪽에 모여앉아 있는 낯선 손님들을 발견하고는 지나치다싶을 만큼 짙은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아, 우직 형님도 와 계셨습니까?”

“오셨는가? 어서 이쪽으로 앉으시게.”

우직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를 반갑게 맞았다. 이사부와 명진은 덩달아 엉거주춤 일어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다부진 몸매를 하고 있는 사내였다. 목이 굵고 완강해 보여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 아닐까 여겨졌다.

“인사 하시게. 여기 이 분은 하슬라에서 건너오신 시전 전주님이시라네.”

우직이 이사부를 소개했다. 이사부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박이종이라고 하오.”

“연철(沿鐵)이라고 합니다.”

그는 경계심을 다 풀지 못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으면서 이름을 밝혔다.

“연철 아우는 이 울릉도에서 최고의 기술을 지닌 대장장이이지요.”

당충이 연철이라는 이름의 사내에 대해서 설명을 보탰다. 이사부는 다시 한 번 가볍게 그를 향해 목례를 했다. 그 때 우직이 뭔가 생각이 났는지 확인하듯 말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연철 자네도 선대 어르신들께서 하슬라로부터 건너오셨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그러자 옆에 있던 당충이 새삼스럽게 무릎을 치며 연철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맞아. 이 봐. 연철 아우! 자네 할아버지가 하슬라 사람이라고 했지?”

그러나 연철은 우직과 당충 두 사람의 말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멋쩍은 낯빛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박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는 말만 들었을 뿐, 제가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 할아버지 살아계실 적에도 하슬라에 대해서 무슨 말씀 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직이 나서서 그 말을 받았다.

“하긴 울릉도 사람들 중에는 조상이 하슬라나 실직에서 건너온 이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굳이 그걸 따지는 일이 무의미하긴 하지.”

이사부가 연철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반가움을 표했다.

“어쨌든 조상께서 하슬라 분이시라니 더욱 새롭습니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

연철은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졌던지 얼굴에 살짝 웃음까지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처음에 투박하게 들려왔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편하게 느껴졌다.

그 때 우직이 연철을 향해 목소리를 낮춰가며 조용히 물었다.

“이보게, 연철. 궁에 구금됐다는 치금(治金)선생과 내풍(耐豊)영감은 어찌 됐는가? 여태 못 풀려났는가?”

우직의 질문을 듣자 연철의 표정이 창졸간에 굳어졌다. 그 역시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대답했다.

“벌써 보름이 넘었는데, 소식을 통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예로 봐서는 아무래도 무탈하시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 ...... . ”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당충이 안타깝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울릉도를 걱정하시는 그 두 어르신들의 말씀은 백번 옳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당신들의 안위는 생각지 않으시고 그렇게 무모한 직언을 지속하시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자 우직이 당충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달래듯이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게. 설마 더 이상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치금선생과 내풍영감님이 누구신가? 이 나라의 충신 중 충신 아니신가. 설마 대왕께서 아주 상하도록 모질게 다루시기야 하겠는가?”

그 말을 연철이 받았다.

“아닙니다. 요즘 들어서 대왕의 심기가 더욱 흐려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왕비에 관한 이야기라면 아주 작은 험담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말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것 참 낭패로세..... .”

연철의 말을 듣고 우직은 더욱 힘을 잃는 모습이었다. 그 무렵 당충이 그 자리에 이사부와 명진이 있었음을 뒤늦게 의식한 듯 말했다.

“아이고, 이거 정말 송구합니다. 그저 우리끼리만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요. 어리둥절하셨겠습니다.”

이사부가 얼른 낯빛을 바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괜찮소이다. 아무래도 아주 긴한 말씀이신 듯한데, 불청객이 끼어 있게 됐군요. 제가 외려 송구하오이다.”

당충이 다시 눈을 끔벅거리며 이사부를 향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여기 박 전주님께서 가져온 물건들을 처분하고 원하는 물건들을 찾아서 챙기려면 최소한 사나흘은 더 이곳 골계에 머무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누추하지만 우리 집에 딸린 방이 좀 있으니 예서 묵으시지요?”

“그래 주시겠소이까? 편의를 봐주겠다고 하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이다.”

이사부가 그렇게 인사말을 하자, 당충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노독도 만만치 않으실 터이니 안으로 드시지요.”

이사부와 명진은 각 물목들 중 하나씩만을 견본으로 남기고 다시 정리해 꾸린 등짐을 들었다. 그리고는 앞장 선 당충을 따라 광 건물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또 다른 너와집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는 생각보다 넓고 방도 꽤 여럿 돼 보였다.

이사부 일행은 대문 근처에 있는 제법 큼지막한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많이 불편하실 터인데,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방문을 열어주고 서 있던 당충이 말했다. 등짐을 안으로 옮겨 놓은 이사부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이만하면 아주 훌륭하구려. 괜찮으니 조금도 심려치 마시오.”

“우선 짐부터 풀어 놓으시고 편하게 쉬시지요..... . 그럼 이따가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당충은 그렇게 말하면서 문을 닫았다. 명진이 등짐들을 방 한 쪽으로 몰아서 가지런히 쌓았다. 한동안 사람이 들지 않았던지 방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명진이 방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허리를 굽혔다.

“바깥을 좀 살펴보고 돌아오겠나이다.”

“그리 하라. 각별히 조심해서 다녀야 하느니라.”

“심려 마시옵소서.”

명진이 방문을 열고 나간 다음 이사부는 마룻바닥에 깔린 왕골 돗자리 위에 드러누웠다. 연속되는 긴장 속에 오랫동안 눌려있던 피로가 눈시울을 타고 물씬 솟아올랐다.

*

“언제쯤 해치우는 게 좋을까요?”

“아무래도 출타할 때를 기다려 거행하는 것이 좋겠지요.”

“자객들은 준비가 잘 돼 있겠지?”

“염려 마십시오. 두 명이 독시(毒矢)를 쏘고 난 뒤 태하령 쪽으로 바람처럼 달아나도록 계획돼 있습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네 명이 더 나서서 도주를 호위하도록 하는 방책도 마련돼 있습니다.”

우직과 당충과 연철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뒤섞이고 있었다.

자리에 누운 지 얼마가 지났을까. 잠시 졸음에 젖어있는데, 희미한 두런거림이 열어 둔 귓바퀴를 휘돌아 고막으로 파고들었다. 이사부는 소스라쳐 놀라 일어나 앉았다. 들켜버린 것일까? 저들이 나의 정체를 기어이 알아차리고 만 걸까? 가슴이 뛰었다.

이사부는 정좌를 하고 앉아서 눈을 감고 단전에 기를 모아 화급하게 통견원문술에 돌입했다. 멀리서 방문을 여닫는 소리와 발길 소리가 섞이면서 그들의 말소리는 희미해졌다가 또렷해졌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문제는 계집이 아니라 대왕의 신통술이야. 대왕께서 함께 움직이거나, 뒤를 바짝 따른다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네.”

우직의 목소리였다. 계집? 대왕? ...그러면 나를 목표로 하고 나누는 이야기는 아니란 말인가.... .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 출타하는 것을 보니까, 주로 계집 혼자서 ‘별님’이라고 하던가 하는 딸과 함께 가마를 타고 나다니더군요.”

당충의 목소리였다. 뒤를 이어 굵직한 연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객들 쪽은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났고요. 설사 거사가 실패해서 붙잡힌다고 해도 즉각 자결하도록 정신무장이 돼 있습니다.”

우직이 다시 그 말을 받았다.

“정말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애써왔는데, 결국 피를 보게 생겼으니 안타까울 뿐이야.”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울릉도 사람 모두가 사느냐 죽느냐 두 끝이 달린 일인데 어쩌겠습니까?”

“그나마나, 대왕께서는 어쩌다가 저렇게까지 되셨는지.... . 도대체 왜 저 왜놈들의 흉악한 계략을 눈치 채지 못하시는지 알 길이 없어요.”

“사내란 그 누구라도 계집에 아주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는 법이지.”

“예사 계집이 아니라잖아요. 대마도 도주(島主)가 아예 어릴 때부터 명기(名妓)로 키운 셋째 딸이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맞아요. 미색이나 가무 재주야 다 알려진 바이지만 방중술(房中術)까지 탁월하다는 풍문까지 돌던데요. 그 방중술 때문에 대왕이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집이 시키는 대로만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대목에 이르자, 이사부는 비로소 그들이 ‘계집’ 운운하는 사람이 우해왕의 비라던 풍미녀를 지칭하는 것임을 눈치 챘다. 대마도 도주의 딸이라고 했던가? 이사부는 더욱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기로 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다면, 대마도주가 아예 계획적으로 자기 딸을 내주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고 봐야지요. 대왕께서 대마도 원정을 갔을 적에 대마도주가 항복하는 척 하면서 길게 내다보고 딸을 내주어 음모를 획책한 것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모야’라는 그 왜인 장수 놈은 아직도 울릉도에 있는 거지요?”

“아, 참. 내가 자네들한테 해 줄 중요한 이야기를 깜빡 잊고 있었네.”

우직의 목소리였다.

“중요한 말씀이시라니요?” “그 모야라는 왜장 놈이 드디어 흉측한 일을 저질렀다네.”

“흉측한 일이라고요?”

“그래. 그 패들이 성인봉에 올라 울릉도의 혈맥을 싹둑 잘라버렸어.”

“예에?”

당충과 연철의 목청이 동시에 높아지고 있었다.

“어제 아침나절에 아무래도 이상한 낌새가 있어서 산에 올라 봤더니 이놈들이 장수바위 밑을 파고 뽑아서 벼랑 아래로 굴려버렸더라고.”

“장수바위는 울릉도의 혈맥, 그것도 대동맥 정수리인데......그걸 뽑아버렸다고요?....저런 쳐 죽일 놈들!”

그 대목에서 그들의 음성은 밀담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다 싶을 만큼 높아졌다. 분노를 그예 참지 못하는 목청이었다.

“예상해왔던 대로 풍미녀라는 계집을 앞세운 왜놈들의 흉계가 본격적으로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하네. 저들이 무슨 못된 짓을 더 저지를 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대왕께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계집에 빠진 것만 가지고도 이미 사단(事端)은 나고 있는 거지요.”

“그 뿐입니까? 바른말을 고하는 충신을 벌써 일곱 명씩이나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지난번 신라군이 쳐들어왔을 때 왕이 신통술로 원정군을 물리치고 난 다음 더욱 기고만장하여 중신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다 하더이다.”

이사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짐작했던 대로 바다를 들썩이게 하고 괭이갈매기와 깍새, 흑비둘기 등 온갖 새들을 총동원하여 군선을 공격하도록 한 일이 모두 우해의 술법이었구나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들의 대화는 더 이어졌다.

“왕께서 신라를 직접 탐색한다고 서라벌 부근까지 침투했던 일은 또 어떻습니까? 그것도 알고 보니 그 계집이 꼬드겼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 바람에 신라 왕궁에서 우리 울릉도를 쳐서 멸하라고 특명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오던데.... .”

“그래도 그들이 쳐들어오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왕의 신통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기는 난공불락의 천혜요새라 함부로 넘볼 곳이 아니니까요.”

“문제는 대왕이 자신의 술법과 지리적 특성만을 믿고 도무지 지금의 그릇된 통치를 바꾸지 않는다는데 있지. 굳이 신라가 아니더라도 이대로 가다가는 울릉도는 저절로 망하게 돼 있네.”

“그렇습니다. 대왕께서 지금이라도 개심을 해주어야 하는데, 계집이 있는 한 그럴 가망이 없으니 큰 낭패지요.”

거기까지 들리고 난 그들의 이야기는 끊어진 채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사부는 다시 심호흡을 하면서 단전에 기를 모았다. 말을 다시 시작한 것은 우직이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네.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아니 당장 내일이라도 결행을 하세. 그 왜녀를 제거하지 않고는 대왕도 울릉도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으이.”

“일단, 왕비의 호위무사를 맡고 있는 왜국 무사들에게 막혀서는 안 되는데 그게 용이하겠습니까?”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준비된 자객들은 최고로 숙련된 자들이어서 치고 달아나는 일에 전혀 차질이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왜녀가 자주 찾는 비파산 쪽에서 거사를 벌여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왜녀가 비파산 앞쪽에서 연회를 벌이는 날이 잦으니 거기에서 기회를 보는 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 문제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

그들의 이야기는 그쯤에서 매듭이 지어지는 것 같았다.

이사부는 단전을 풀었다. 저들이 우해왕의 왕비라는 그 풍미녀를 시해하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그들의 대화로 미루어보건대, 우해왕은 처음에는 우산국 사람들 모두의 신망을 받는 군주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대마도 정벌을 갔다가 그곳 도주가 바친 딸 풍미녀를 왕비로 맞이한 다음부터는 제대로 된 통치에 뜻이 없고, 왜녀의 미색에 도취해 산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산국을 침탈하려는 왜국의 계략마저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정신을 놓고 있다는 결론인데..... .

이사부는 눈을 감고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깊은 생각에 젖어들었다.

-연재 14회로 이어집니다-

<註>

* 광(창고) * 독시(毒矢, 독화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