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 휘 / 그림: 문 악 보

“소인 다녀왔습니다요.”

밖으로 나갔던 명진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긴박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래, 바깥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지금 좀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요. 백성들이 포구로 모여들고 있습니다요. 궁궐에서 누군가 나오고 있다 합니다요.”

자세히 보니 그렇게 말하는 명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그러하냐? 누가 나온다는 말이냐?”

“군사들이 포구 쪽을 에워싸고 백성들의 접근을 막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우해왕이 나오는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요.”

순간, 흥분으로 이사부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우해가 궁에서 나온다고? 드디어 우해를 직접 볼 수 있게 되는 건가?

“우해왕이 나타난다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요. 사람들 쑥덕거리는 말들을 묶어서 유추해본 바로는 소인의 짐작이 거기에 닿습니다요.”

이사부는 의복을 추스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진이 방문을 밀어젖히며 앞장섰다.

왕궁으로 오르는 기다란 길에는 언제 어디에서 쏟아져 나왔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빼곡히 늘어서서 허리를 굽히거나 엎드려 있었다. 군사들은 양팔간격으로 돌아서서 그들을 가로막으며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행렬은 포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사부와 명진은 군중들 사이에 소리 없이 들어서서 함께 몸을 낮춘 채 왕궁 쪽을 살폈다.

휘어진 길 위편 잘 보이지 않는 왕궁의 성문 안쪽에서 이윽고 한 떼의 사람들이 나오는 기미가 느껴졌다. 머지않아 구부러진 길을 돌아 나타난 것은 검은 빛깔의 커다란 가마였다. 지붕이 없는 남여(籃輿) 형태의 우람한 가마는 앞뒤 각각 여섯 사람씩 모두 열두 명의 건장한 가마꾼들이 메고 있었고, 의자 옆 금빛 치장이 화려했다.

길가에 나와 늘어선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땅에다 처박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해대왕 납시오!”

누군가 우렁찬 목소리로 우해의 등장을 알렸다. 가마꾼들의 발소리가 절걱절걱 제법 크게 들렸다. 이사부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곁눈질을 해 우해의 모습을 살폈다.

과연 듣던 바대로 우해는 기골이 장대한 장수의 용모였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기다란 콧수염까지 길러 내린, 한 눈에 봐도 특출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오만함과 살기가 뚝뚝 흘러내리는 그는 첫 느낌에서부터 섬뜩했다.

그런데, 우해가 탄 가마 한참 뒤 쪽으로 온몸이 꽁꽁 묶인 채 군사들에 의해 절름거리며 끌려 내려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이미 형신을 많이 당한 듯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아니? 저 분들은 치금 선생과 내풍 영감 아닌가?”

군중 속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 제서야 이사부는 당충의 광 안에서 우직 일행이 함께 나누던 밀담을 떠올렸다. 우해왕이 탄 가마와 죄인 형상으로 묶인 사람들 행렬이 포구 쪽으로 내려가자 사람들은 소리 없이, 그러나 하나같이 긴장한 모습으로 조심조심 그 뒤를 따랐다. 이사부와 명진은 천천히 그들 속에 섞였다.

“아무래도 저들을 처형할 모양입니다요.”

명진이 귓속말처럼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사부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동감을 표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며 따라가고만 있었다.

일행이 포구 끝 바다를 향해 뻗어있는 낭떠러지 위에 다다르자, 우해가 가마에서 천천히 내렸다. 짐작했던 대로 그의 키는 일곱 척 가량 되어 보였고, 몸에서는 힘이 넘치는 듯 했다. 굳이 그의 용한 술법이 아니더라도, 험궂은 외양만으로도 웬만해서는 대적이 쉽지 않을 기상이었다.

우해는 이윽고 행렬의 뒤 쪽에서 밧줄에 묶인 채 끌려온 두 사람을 벼랑 끝에 세운 다음, 모여든 수많은 백성들을 향해 돌아서서 우렁우렁 소리쳤다.

“모두들 들어라! 여기에 있는 치금과 내풍 두 죄인은 우산국의 위기와 패망을 번번이 입에 올리며 민심을 어지럽혀온 자들이로다. 짐이 이들에게 수차례 불충한 언동을 경고하고, 반성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요설을 그치지 아니 하므로 부득이 이놈들을 수장형(水葬刑)에 처할까 하노라. 오늘 이들의 극형을 본보기로 삼아 더 이상 짐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나오지 않게 되기를 바라노라.”

쩌렁쩌렁한 그의 목청은 모여든 백성들을 위압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컸다. 그가 내뿜는 기에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과연 대단한 인물이로구나.... . 군중 속에서 이사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이 우해는 벼랑 끝에 무릎 꿇려 앉혀진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치금과 내풍 네 이놈들! 이제 황천으로 가기 직전인 판에 아직도 더 뱉어낼 요망한 변설이 남아 있더냐? 어디 있다면 마저 해봐라! 만약 지금이라도 불충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내 너희들의 목숨만은 부지하도록 해줄 용의가 있느니라.”

두 사람 중 유독 피투성이가 된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왕 폐하! 신 치금 마지막으로 폐하께 간하나이다. 지금 저 서쪽 바다 건너 신라국은 날로 웅비하는 기세를 바탕으로 머지않아 대군을 이끌고 우산국 복속을 꾀하러 몰려올 것이나이다. 폐하께서 지금처럼 저들을 얕잡아 보고 국사를 등한시한 채 오만과 풍류에 빠져 계시오면 우산국의 멸망은 불 보듯 뻔한 이치이옵니다. 더욱이, 폐하께서는 왕비 풍미녀의 꼬드김에 넘어가 우산국 백성들로 하여금 근본 없는 오랑캐들처럼 해적질을 일삼도록 까지 만들고 있지 않으십니까? 바라옵건대 부디 통촉하시고 성심을 바로 하옵소서!”

죽을힘을 다해서 부르짖고 있는 그의 외침은 가슴이 뭉클하도록 절절했다. 이사부는 신라의 정벌을 예상하고 근심하는 그의 말에 움찔 하고 심부가 오그라드는 경계심을 느꼈다.

우해가 갑자기 푸하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네 이놈! 일전에 신라 놈들이 쳐들어왔다가 이 울릉도에 범접도 못해보고 배가 부서져 혼비백산 달아나는 꼴을 보지 않았더냐? 저들에게는 하늘과 땅과 바다를 움직이는 짐의 전능을 넘을 재주가 있지 않거니와, 설사 용케 접안을 한다 해도 하늘이 내린 요새인 울릉도를 결코 장악할 수가 없을 것이다. 네 놈의 그 허황된 망국론은 오직 짐을 모독하는 망상일 뿐임을 왜 기어이 모르는가? ....아니지, 아니지! ...네 놈은 모종의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끝까지 짐을 음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도다. ..이 천하에 무엄한 놈!”

그렇게 고함치는 우해는 극한 흥분으로 식식거렸다. 그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옆에 꿇어 있던 노인이 입을 열어 힘이 빠진 목소리로 기를 쓰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그는 구부정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대왕 폐하! 신 내풍도 목숨 떨어지기 전에 한 말씀 더 올리겠나이다. 소인은 왜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그들의 행태와 사고방식을 낱낱이 경험했나이다. 연전 대마도를 치러 갔을 적에 소인이 정벌의 길잡이로 나서서 폐하를 보필한 일은 폐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지 않으시옵니까? 왜국은 절대로 우리 우산국과 선린(善隣)을 유지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마도주가 그의 딸 풍미녀를 폐하께 내어준 일은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우산국을 집어삼키고자 하는 저들의 마각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닥쳐라! 네 이놈! 어디서 감히 착하디착한 나의 왕비를 끝내 모함하려 드는 게냐? 그리고, 훈도시나 차고 날 생선이나 잡아먹고 사는 쪽발이 왜놈들이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대 우산국을 범한다는 말이냐? 그따위 근거 없는 요사한 말장난으로 짐의 권위를 흔들려는 저의가 대체 무엇이냐?”

“대왕폐하! 소인의 말을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마옵소서. 우산도(于山島)가 저들의 수중에 들어가면 옆구리에 들이 댄 비수가 되어 울릉도가 위태롭게 될 것이고, 울릉도 역시 반도의 옆구리에 들이댄 칼이 될 것이옵니다. 풍미녀를 대마도로 다시 내치시는 것은 물론 울릉도와 우산도에 드나들고 있는 왜인들을 모조리 소탕하시어야 하옵니다. 그들의 행태를 절대로 얕잡아보면 아니 될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소서.”

순간 우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흥분에 겨운 그의 거친 숨소리가 곧 폭발할 듯 커져갔다.

“이런 쳐 죽일 놈들! 목숨을 스스로 부지할 생각이 도무지 없는 놈들 아니냐? 그렇게도 짐과 왕비를 능멸하는 언동을 멈추라 경고했거늘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그리 못된 주둥이를 놀리다니 괘씸한지고! 더 들어볼 것 없다. 여봐라! 저 죄인들에게 돌을 매달아라!”

우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몰려나온 백성들이 술렁거렸다. 어디선가 낮은 신음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서 무어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해의 명령을 들은 군사들이 달려들어서 벼랑 끝에 꿇어앉아 있는 치금과 내풍이라는 두 사람의 몸에 각각 커다란 돌을 밧줄로 묶어 맸다. 우해가 몰려든 백성들을 향해 다시 돌아섰다.

“잘들 보아라! 짐의 뜻을 거슬러 요망한 언행을 일삼으면서 죄 없는 왕비를 모해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똑똑히 지켜보아라! 앞으로 또다시 이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이제부터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일족까지 모조리 멸할 것이다!”

그렇게 외친 우해는 낭떠러지 위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사지가 묶인 채 돌까지 매달린 치금과 내풍을 차례차례 양손으로 냉큼 들어 올려 절벽 아래 시퍼런 파도를 향해 엄청난 힘으로 집어던졌다.

두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한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모여 든 사람들 사이에 또다시 낮고 깊은 신음소리가 끄응 하고 번져나갔다.

순간, 이사부의 뇌리에 사개로 왔다가 우해에게 참수를 당한 준모가 떠올랐다. 우해 저놈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자로구나.

이사부는 치금과 내풍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도 태연히 철썩거리고 있는 바다를 응시했다. 그 바다 안 깊은 곳에서 용틀임하는 시커먼 해귀들을 보았다.

바다를 한동안 무연히 바라보던 이사부는 명진과 함께 천천히 당충의 집으로 돌아왔다.

당충의 너와집 창고에는 당충과 더불어 우직, 연철 그렇게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필경 현장에서 함께 처형의 참상을 보았을 그들은 서둘러 그리로 돌아온 낌새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지극한 슬픔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열린 문으로 막 들어선 이사부에게 당충이 물었다.

“처형장을 보고 오는 길이시오?”

“예. 실로 끔찍한 장면이었소이다. 제가 못 볼 것을 본 건 아닌지.... .”

이미 그들의 대화를 낱낱이 엿들었던 이사부로서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비통한 마음일 것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대화에 무턱대고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침묵이 늘어지면서 이사부는 그 야릇한 분위기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사부는 그들에게 가벼이 목례를 하며 말했다.

“말씀들 나누시지요. 저는 이만 안으로 들어가서 쉬겠소이다.”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선 당충으로부터 눈인사를 받으면서 이사부는 창고를 나왔다. 저 멀리 이른 봄 바다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

“앗! 아니 저 사람들은 그저께 성인봉에서 장수바위인가 뭔가 하는 그 바위를 산 아래로 굴려 내린 왜인들 아닙니까요?”

다음날, 섬을 구경시켜주겠다는 우직을 따라 아른 아침부터 나선 길이었다. 세 사람이 골계에서 오른 쪽으로 능선을 가로지르며 통구미를 지나 감을계 등성이 간령재라는 곳을 막 넘었을 무렵 명진이 목소리를 눌러가며 말했다. 저만큼 앞서서 중령이라고 불리는 언덕으로 가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발견하고 살펴보던 중에 그들의 정체를 먼저 알아본 것은 명진이었다.

“그런가? 저들이 분명 장수바위를 뽑은 자들인가?”

우직이 긴장한 눈빛을 반짝이며 나직한 목청으로 명진의 말을 받았다. 다섯 명으로 헤아려지는 그들을 향해 이사부가 귀를 열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와깟다 다깟다 하는 소리를 내는 왜인들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역시 이름이 ‘모야’라던 왜인 장수 그 자였다. 그들 중 두 명은 맨 손이었고, 세 명은 각자 연장처럼 보이는 기다란 물건들을 어깨에 둘러메거나 손에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저놈들 또 무슨 짓을 하러 어디로 몰려가는 건가? 몰래 쫓아가 봅시다.”

우직은 앞장서서 그들을 미행해볼 것을 제안했다. 이사부와 명진은 말없이 우직을 따랐다. 왜인들은 뭐라고 계속 지껄여가며 새각단이라는 곳이 바라보이는 사동에서 방향을 왼쪽으로 틀더니 성인봉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무래도 저들이 성인봉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

우직이 습관처럼 희끗한 구레나룻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혼잣말로 자신의 짐작을 중얼거렸다. 그들의 목적지가 성인봉일 거라는 우직의 말을 듣자 이사부가 의문을 표했다.

“저들이 왜 또다시 성인봉으로 오르는 걸까요? 저번에 장수바위를 뽑아서 아래로 굴러 내렸으니 목적을 다 이룬 게 아니었던가요?”

우직은 조심조심 앞장서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뒤쫓았다. 경사가 제법 심해진 계곡 길에 다다른 왜인들은 이제 모두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다.

울릉도의 풍취는 역시 실로 대단했다. 멀리 내다보이는 바다의 빛깔도 처처에 따라 아름답기가 달랐고, 군데군데 묵은 향나무가 기묘한 형상으로 아슬아슬 매달린 바위들의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배를 타고 바깥에서 보는 모습이 경이롭듯이, 섬 안에서 보는 경치 또한 매우 신비스러웠다.

저만큼 앞서서 산을 오르는 왜인들의 발길이 성인봉을 향하고 있음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었다. 일행은 왜인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적당한 거리를 지켜가며 끈덕지게 산을 올랐다. 섬에 잠입하여 처음 올랐던 서쪽 서달령 방향보다는 길이 훨씬 수월했지만 여전히 가파른 곳이 많았다. 명진이 어디에선가 나무 막대기 하나를 주워 와서 이사부에게 지팡이로 쓰라고 내밀었다. 한 발 가량 되는 길이의 막대기는 팔뚝만큼 굵었다.

왜인들의 목적지는 과연 성인봉 정상이었다. 반나절 남짓의 부지런한 발걸음 끝에 정수리 부근에 다다른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나머지 사람들이 다리쉼을 하는 동안 ‘모야’라는 이름의 장수가 산 정상 근처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뽑아 내리기 전 장수바위가 서있던 원래의 자리로 다가갔다.

모야는 바닥을 가리키며 뭐라고 연방 지껄였다. 그러던 그가 한참만에야 어딘가 위치를 찾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들 중 한 사람이 어께에 메고 있던 굵고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을 그 곳에다 세웠다. 막대기의 길이는 다섯 자 남짓 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자가 들고 있던 망치로 그 막대기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쨍쨍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서 그들이 박고 있는 막대기는 쇠붙이임이 분명했다.

“도대체 저놈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우직이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이사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혈침(穴針)이로구나! 언젠가 스승 경천선사로부터 받은 가르침이 떠올랐다.

“저 왜인들은 지금 흉악한 짓을 하고 있소이다.”

이사부가 조용히 말했다. 우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사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사부는 치밀어 오르는 흥분을 눌러가며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산의 정기를 관장하는 혈도(穴道)는 대개 정상에 있소이다. 그 혈 자리에다가 쇠말뚝을 꽂아 놓으면 정기가 아주 틀어 막혀서, 그 일대의 지역은 융성하지 못하고 끝내 소멸하는 법이지요. 아마도 저들은 장수바위를 굴려 내린 것에 만족하지 않고 혈도를 아주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해서 혈침을 박으러 올라온 모양이오이다.”

이사부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우직의 얼굴에 형언하기 힘든 분노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달려가 어떻게 해보고 싶은 충동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듯 했다.

“저런 죽일 놈들! 도저히 그냥 둬서는 안 되겠네!”

어느새 우직은 숨소리까지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저 쇠말뚝은 다 박고 나면 다시 뽑아내기가 쉽지 않을 거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저 놈들을 내치고 막아야 하오.”

이사부는 자신이 나서야 할 것인지 아닌지를 잠시 고민하며 머뭇거렸다. 화급한 상황이었다. 당장으로서야 우산국이 적국이니, 왜인들이 이들을 망하게 하고자 하는 짓이 나쁠 이유가 없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왜국의 반도침략 야욕이 명약관화한 바에야 저들을 막는 것이 나아가 신라를 지키는 길이기도 할 것이리라. 이사부는 저들을 지금 막아내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우직을 향해 이사부는 단호히 말했다.

“우직 선주께서는 저들에게 얼굴이 드러나면 곤란할 터이니, 여기에 꼼짝 말고 있으시오. 내가 저들을 퇴치하겠소.”

“아니, 어떻게 박 전주님 혼자서 저들을 감당하려고 그러시오? 복색은 저래도 저들은 왜국 장수와 병사들인데?”

이사부는 우선 명진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수건을 낚아채어 코와 입을 가려 묶어 맸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나무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쥐며 벌떡 일어섰다.

“걱정 마시고 잠자코 기다리시오.”

이사부는 그렇게 짧게 말하고 난 뒤, 날랜 동작으로 쇠말뚝 박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왜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나무지팡이를 치켜들고 느닷없이 달려드는 이사부를 먼저 발견한 것은 모야였다.

“다래다(누구냐)?”

모야는 쇳소리가 섞인 둔탁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며 재빨리 허리춤에서 뭔가를 뽑아들었다. 단도(短刀)였다. 이사부는 날카롭고 정확한 동작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모야도 만만치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모야는 키만 조금 작을 뿐, 소나무 둥치처럼 굵고 완강한 목을 지닌 장골이었다.

이사부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모야가 단도를 휘둘러 역습을 시도해왔다. 모야의 칼질을 가볍게 따돌린 이사부가 다시 상대방의 급소를 겨누어 지팡이를 찌르고 들어갔다. 모야가 다시 이사부의 공격을 피하며 단도를 세우고는 바람소리를 내며 찔러왔다.

이사부가 몸을 틀며 단도를 잡은 모야의 손목을 지팡이로 힘차게 올려친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모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단도를 떨어뜨리고 휘청거렸다. 이사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허공을 타원으로 가르며 휘둘러진 이사부의 지팡이가 모야의 정강이를 세차게 강타했다. 모야는 한 순간에 나동그라졌다.

그 무렵 얼어붙은 듯 꼼짝을 못하고 서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왜인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저만큼 나가떨어졌던 모야가 황급히 일어나면서 외쳤다.

“기미와 잇따이 다래다(너는 도대체 누구냐)?”

이사부는 복면 위로 날카로운 눈을 치뜨고 그를 쏘아보면서 또다시 지팡이를 겨누었다. 드디어 모야가 안 되겠다 싶었던지 뒤로 돌아서서 일행과 함께 산 아래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사부는 혼비백산 줄행랑을 치는 그들의 뒤를 거칠게 쫓아내려갔다. 한 번 도망치기 시작한 왜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르듯 미끄러지듯 황급하게 산을 달려 내려갔다. 이사부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숲 속에 숨어있던 우직과 명진은 왜인들이 멀리 도망치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들이 박다 만 쇠말뚝 쪽으로 다가왔다. 우직이 반쯤 땅속으로 박힌 쇠기둥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런! 굉장히 큰 쇠말뚝이네. 박 전주님 말씀대로라면 저 왜인들은 참으로 고약한 놈들이 아닐 수 없구먼. 도대체 울릉도를 어찌 보고 이런 못된 짓을 서슴지 않는단 말인가?”

이사부는 비로소 얼굴을 가렸던 수건을 풀었다. 우직과 명진이 마주서서 땅에 박힌 철주를 손으로 잡고 흔들면서 끙끙 소리를 내며 뽑아 올리고 있었다.

*

성인봉 정상에서 반쯤 박힌 쇠말뚝을 다시 뽑아들고 내려오는 길에 일행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우직이 골계가 저만큼 보이는 길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사부와 모야의 대결을 입에 올렸다.

“박 전주께서는 대체 어디에서 그런 훌륭한 무술을 익히셨소?”

“무술이라니 당치 않으시오. 사시사철 먼먼 장삿길을 다니는 사람이라 험한 일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보니 호신이나 할 요량으로 익혀둔 막대기 싸움기술일 뿐이라오.”

이사부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우직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사부의 말을 되받았다.

“내 눈에는 결코 가벼운 무술이 아닌 것으로 보였소. 빼어난 내공이 느껴지는 대단한.... .”

이사부가 다시 우직의 말을 끊으며 난처한 듯 말했다.

“아니요. 그저 잡기(雜技)에 불과하오.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우직 선주께서 자꾸 그러시면 내가 너무 민망하오이다.”

“어쨌든, 덕분에 성인봉의 정기를 아주 끊어놓으려는 저들의 흉계를 일단 막아냈으니 감사의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으오. 정말 고맙소이다, 박 전주님.”

그쯤에서 우직은 발걸음을 멈추고 가벼운 목례로 경의를 표했다. 이사부는 다짐하듯 정중하게 부탁했다.

“왜인들을 산봉우리에서 내친 일에 이 몸이 나선 사실이 알려지면 공연히 서로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으니 오늘 산에서 있었던 일은 일체 발설치 말아주시오.”

우직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아무렴요. 염려 푹 놓으시구려. 내 단단히 함구하오리다.”

전날 일어났던 수장형의 참사를 그 새 잊은 듯 골계는 외견상 평화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멀리 또는 가까이에 펼쳐진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수많은 다랑이 농토에는 평화롭게 밭을 가꾸는 농부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

한 밤중에 공연히 가슴이 서늘하여 잠을 깼다. 잠도 아니고 꿈도 아닌 미몽의 틈바구니로 안개처럼 스며드는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산단화..... . 이사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성인봉을 오르내린 일이 피곤했던지, 명진은 죽은 듯이 골아 떨어져 있었다.

만약 산단화가 아직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이곳 어디엔가 있을 터인데.... . 제발 살아 있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 이사부는 가슴을 파고드는 애잔한 그리움에 한숨이 났다.

섬에 들어와서 우직을 만나 그의 안내로 우산국의 심장부인 골계까지 잠입해 들어온 일은 대단한 일이다. 울릉도의 지리를 염탐하고, 적국의 왕인 우해를 직접 보게 된 일만 해도 작은 소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뭔가 시원한 정보를 캐내어 묘방을 찾아낸 것도 아닌 처지.... . 이사부는 도리질을 쳤다. 일단 잊어야 한다. 이 섬에서 해야 할 정탐임무들을 마칠 때까지는 산단화에 대한 생각일랑 묻어두어야 할 일이다.

다시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애써 번민을 밀어내며 잠을 청했다. 아직은 그녀를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

“박 전주님 기침하셨소이까?”

이른 아침, 미처 걷혀지지 않은 진한 졸음을 뚫고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충이었다. 이사부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오시오, 당충 행수.”

“아, 일어나 계셨군요.”

당충은 문지방을 넘어서며 방안을 한차례 톺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당연히 아직 잠들어 있으리라 여겼던 방문 옆 명진의 잠자리에는 벙긋이 치켜 들린 이불만 놓였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잠시 바람이라도 쐬러 나간 것인가.

“어인 일이시오? 교환할 물목들이 다 찾아지셨소이까?”

“예. 다행히 진주를 갖고 있는 소상(小商)이 있어서 그것도 좀 구했습니다. 양은 그리 많지 않으나, 품질이 워낙 좋아서 괜찮으실 겁니다. 수달피도 몇 장 받아놓았습니다. 그리고 최고급 향과 건오징어도 최상품으로 구해놓았으니 이제 거래를 성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수고가 많으시었소. 명진이 돌아오면 거래를 마무리 지으라고 이를 것이니 그리 정리하십시다.”

“알겠습니다. 그나마나 잠자리를 비롯하여 묵으시기에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 염려스럽습니다.”

“무슨 말씀을.... . 편안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때 밖에 나갔던 명진이 방으로 들어서다가 당충이 와 있는 것을 보고는 약간의 호들갑을 섞어가며 인사를 했다.

“아이고, 행수님 오셨습니까요?”

“아, 예. 어디 나갔다 오는 길이시오?”

“예. 잠도 깰 겸 해서 주변을 한 바퀴 돌았습지요. 이 몸이 원래 타고나기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지라.... .”

이사부가 명진을 보고 말했다.

“당충 행수께서 요긴한 물목들을 모두 챙기셨다하니, 잘 살펴서 거래를 매듭짓도록 하거라. 이렇게 후의를 베풀어주시니 너무 야박하게 셈을 하지는 말고..... .”

명진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요. 곧바로 행수님과 거래를 마무리하겠습니다요.”

명진과 당충이 방안에 있던 등짐들을 들고 방을 나갔다.

이사부는 방안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당충과 명진이 곧 거래를 매듭짓고 나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물 명분이 없어진다. 우산국을 공략할 묘책을 찾기는커녕 이 섬이 얼마나 완강한 요새인지, 우해왕이 얼마나 모질고 험한 작자인지나 겨우 알아낸 판이다.

산단화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내어 구출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사여부조차 알아내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사부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답답함은 곧 나른함으로 번져왔다.

이사부는 잠시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거래가 끝난 다음에는 산단화가 어떻게 됐는지,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잠시라도 수소문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이사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망연히 누워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머지않아 명진이 방으로 돌아왔다. 낯선 장정 하나가 이사부의 등짐을 들고 명진을 따라와 방에 들여놓고 나갔다.

“전주님! 거래가 잘 끝났습니다요. 진주 다섯 개에 수달피 일곱.... .”

이사부가 낮고 매서운 목소리로 명진의 말을 툭 잘랐다.

“됐다. 그 쯤 해 둬라. 내가 물건 바꾸러 온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명진은 그 제서야 정신이 난 듯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굽실거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제가 그만 깜빡.....죄송합니다요.”

“괜찮다. 그건 그렇고, 바깥소식은 뭐 별다른 게 없느냐?”

잠시 눈을 껌벅거리던 명진은 뭔가 생각이 난 듯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오늘 낮에 풍미녀라던가 하는 왕비가 비파산이라는 곳에 납신다고 합니다요. 왕비가 워낙 미인인데다가 화려한 출타인지라, 수월찮이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온다고도 하고.... .”

명진의 이야기를 듣자 이사부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왕비가 궁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우직과 당충, 연철이 모의하고 있던 왕비 시해가 감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인데..... . 그들은 독시를 쓴다고 했다. 출중한 무사들이 준비돼 있다고도 했다. 이사부는 적잖이 솟아오르는 흥분을 느꼈다.

“그게 언제쯤이라더냐? 아니, 네가 밖을 살피고 있다가 내게 일러라.”

내막을 알 턱이 없는 명진은 얼굴에 비식하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절세미인이라 하니 한번 보시는 것도..... .”

이사부는 또다시 싸늘한 말투로 질책하듯 말했다.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보고 확인해두어야 할 일이 있느니라.”

“아이고, 송구합니다요. 제가 자꾸만 본분을 잊고서 그만..... . 조심하겠습니다요.”

명진은 금세 머리를 조아리며 죄민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모습는 영락없이 약삭빠르게 표변하는 장사꾼 모습 그대로였다.

-연재 15회로 이어집니다-

<註>

* 남여(籃輿, 의자와 비슷한 작은 승교乘轎) * 우산도(于山島, 무릉도武陵島, 독도獨島) * 감을계(감은계, 현포玄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