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 휘 / 그림: 문 악 보

제5장 풍미녀(豊美女)

5.3 비파산 연회

먼발치에서 바라본 비파산 기슭 연회장은 상상했던 것보다 한층 더 화려했다. 날아갈듯이 덩그러니 쳐진 형형색색의 차일 아래 산해진미로 보이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졌다.

이윽고 먼저 도착한 열두 명의 시녀들이 비파를 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수려한 꽃 장식을 주렁주렁 단 커다란 가마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 안에서 풍미녀라는 왕비가 내렸다. 당충의 말대로, 대여섯 살 쯤으로 보이는 이름이 ‘별님’이라던가 하는 딸이 함께 내렸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풍미녀와 함께 가마에서 내린 커다란 새 한 마리였다. 몸은 희고, 이마와 목과 일부 날개에 검은 깃털이 나 있었다. 그 새는 마치 어미를 따라가듯 풍미녀를 졸랑졸랑 따라다니고 있었다.

“저 새는 또 무엇이냐?”

이사부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아무래도 저 새는 길들인 학(鶴)인 것 같습니다요.”

명진이 실눈을 뜨고 자세히 살피며 말했다.

과연, 머리 꼭대기의 검붉은 색깔이 선명한 그 새는 학이었다. 학도 저렇게 길을 들이면 사람을 따르는 것인가, 의아스러웠다.

풍미녀는 듣던 바대로 역시 미인의 태를 풍겼다. 멀리서 보아도 얼굴이 보름달처럼 희고 둥글었으며, 이목구비가 선명해 보였다. 걸음걸이도 살랑살랑 간드러지는 모양새였다.

연회석 가운데자리에 앉은 풍미녀는 비파소리에 흠뻑 빠져들어 행복한 표정으로 회식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왕비는 차려진 음식을 차례로 맛을 보다가, 시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활짝 웃기도 하는 등 즐거운 모습이었다.

한동안 비파연주를 즐기고 있던 풍미녀가 이번에는 직접 비파를 껴안은 채 의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비파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왜어(倭語)로 부르는 노래라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음이 꽤나 구슬펐다. 고국을 멀리 떠나 살고 있는 왜녀의 가슴에 흥건히 젖어드는 향수를 간드러진 목소리에 담아 부르는 노랫가락 같았다.

이사부는 문득 독화살을 써서 왜녀 왕비를 시해하겠다던 우직 일행의 모의를 떠올렸다. 어쩌면 곧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며시 긴장이 솟아올랐다.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특별히 무슨 사단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왕비의 비파산 연회는 오랫동안 지속됐다. 연회가 끝날 무렵 왜녀는 술을 많이 마셔 꽤나 취한 듯 몸을 비칠거렸다. 왜국에서 우산국까지 풍미녀를 따라 온 것으로 여겨지는 시녀들이 느릿느릿 왕비를 부축하여 가마에 태우고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 커다란 가마 안에는 딸 별님과 눈부시게 흰 깃털을 가진 학이 함께 타고 있었다.

우직 일행의 시해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거사가 사전에 발각이라도 됐단 말인가? 이사부는 불현듯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어쩌면 그 화가 자신에게도 미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할 일이었다.

“명진아. 달려가서 당충의 집을 염탐하고 오너라. 누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용히 분위기를 살펴보고 와야 한다.”

명진이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궁금증에 겨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예에. 알겠습니다요.”

명진이 휭 하니 마을 쪽으로 내려간 다음 이사부는 잠시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해맑은 쪽빛을 뽐내며 일렁이고 있었다. 또다시 산단화 생각이 떠올랐다. 물빛만큼이나 새뜻한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샘처럼 솟아올랐다. 산단화 낭자.....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오? ...... .

“당충 행수의 창고에는 당충 행수와 우직선주, 그리고 연철인가 하는 사람까지 다들 모여 있습니다요.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모두들 상기된 표정이었습니다요.”

명진의 걸음은 과연 빨랐다. 잰 걸음으로 마을까지 달려갔다 온 명진은 숨도 별로 안 차하는 씩씩한 모습으로 살피고 온 동정을 보고했다.

“그리 좋은 낯빛들이더냐?”

“예. 드러내놓고 신명이 난 얼굴들은 아니고, 어딘지 약간은 긴장된 분위기도 엿보이긴 했사옵니다만 그런대로 밝은 표정들이었습니다요.”

“그래, 알았다. 당충의 집으로 가자.”

이사부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마을로 향했다.

*

“박 전주님. 당충 행수와의 거래는 잘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하슬라로 돌아가셔야 할 터인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는 잠시 후에 예선창으로 출발할 생각입니다마는.... .”

우직은 이사부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물어왔다. 그 사이 연철은 어디로 갔는지, 당충의 집에는 우직과 당충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명진의 말마따나 정말 밝은 표정들이었다.

“그러십니까? 일단 저희들도 우직 선주님과 함께 예선창으로 가겠습니다. 거기에서 적당할 때에 배를 좀 내어주시면 그편으로 하슬라로 건너가면 될 것 같은데요. 물론 배 삯은 넉넉히 치를 터이니 염려마시고요.”

“아,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우직은 선선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당충이 말했다.

“잘 됐군요. ....그건 그렇고, 거래도 아주 잘 성사됐고 해서 제가 안에다가 음식을 좀 장만하라고 일러놨습니다. 음식이 곧 나올 터이니 함께 나눠드시고 출발하시지요.”

이사부는 당충을 향해 깎듯이 목례를 하며 말했다.

“당충 행수께서 거래를 편안하게 해주셨다는 말씀 명진으로부터 잘 들었습니다. 배려해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별식까지 주신다 하시니 더 없이 감사합니다.”

당충도 예의를 다해 인사를 받았다.

“원 별 말씀을요.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박 전주님의 특별한 당부가 있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거래가 아주 수월했습니다. 넘겨주신 물건들이 너무 훌륭하여 저는 큰 재미를 보게 생겼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 때 집 안채에서 당충의 처와 식비(食婢)가 음식이 담긴 큰 쟁반을 들고 건너왔다. 울릉도에서 나는 갖은 나물반찬과, 생선구이가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일행은 별 말 없이 한동안 음식을 먹었다. 그 동안 변변히 끼니를 챙기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울릉도 특산물로 정성을 다해 지은 음식이라 특별히 맛이 좋았다. 명진은 모처럼 받은 좋은 밥상에 신이 난 듯 무척이나 게걸스럽게 식탐을 부렸다.

음식을 한참 먹고 있을 무렵, 어디를 다녀왔는지 연철이 돌아와 이사부에게 목례를 한 다음 자리에 함께 앉았다. 그는 무슨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표정도 약간은 상기돼 있었다.

“어서 오시게. 음식부터 우선 좀 드시게.”

우직이 연철에게 음식을 권했다.

“아, 예. 그러겠습니다.”

그러는 연철의 표정에, 동석한 이사부 때문에 말머리를 꺼내놓기를 저어하는 낌새가 배어 있었다. 어쨌든 연철까지 그렇게 다섯 사람은 포식을 했다.

“그럼 저희들은 안에 들어가서 짐을 좀 꾸리겠습니다. 말씀들 나누시지요.”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 이사부는 그렇게 서둘러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충이 잠시 함께 일어서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일어나셔도 되는데..... .”

“아닙니다. 모처럼 아주 좋은 식사였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서 이사부는 명진과 함께 그들이 묵던 너와집 안채 대문 옆방으로 돌아왔다.

*

“그래. 왜녀는 어찌 됐는가?”

우직이 연철에게 물었다. ...이사부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통견원문술을 썼다. 정좌하고 앉아서 집중하고 있는 이사부를 명진이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약이 든 차를 마시고 난 뒤 한참 만에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는데, 아직 숨은 붙어있답니다.”

“그래, 그럴 거야. 약을 아주 정확하게 썼기 때문에 바로 죽지는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아니? 독시를 쓴다더니 독약을 사용한 건가....?

당충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확실하게 죽기는 하는 거야?”

연철이 대답했다.

“그럼요. 믿어도 될 것 같습니다요. 아마도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겁니다.”

차에 독약을 타 넣었구나. 이사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어서 우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독시를 쓰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야. 경계가 부쩍 심해져서 위험성이 높았거든.”

당충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독화살을 쏘았다면 문제가 아주 커질 뻔 했습니다. 어쩌면 무고한 사람들까지 여러 명 희생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다시 우직이었다.

“그래도 안심해서는 안 돼. 왕비가 죽고 나면 왕이 정신을 차릴지, 아니면 더 미쳐서 날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야.”

연철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가혹한 피바람이 불 지도 모릅니다.”

당충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래도 풍미녀는 죽어야 합니다. 그 왜녀야말로 우리 울릉도의 가장 큰 액운덩어리입니다.”

우직이 말을 받았다.

“그건 맞는 말이야.”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짐을 꾸려서 출발을 해야 할 시각이었다. 이사부가 결가부좌를 풀자, 긴장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던 명진이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전주님. 채비가 다 됐습니다요.”

“알았다. 가자꾸나.”

두 사람은 등짐을 하나씩 걸머지고 당충의 집을 나섰다. 섬을 향해 내리쬐는 하오의 햇볕이 따사로웠다.

-연재 16회로 이어집니다-

<註>

[제 5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