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 휘 / 그림: 문 악 보

‘우산도(于山島)’

-이사부, 우산국을 정벌하다 -제16회-

제6장- 해후(邂逅)

6.1 나리촌

골계에서 돌아오는 뱃길에서 우직은 말이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사뭇 초조한 기색이 어른거렸다.

이사부는 우직이 그토록 좀처럼 조바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통견원문술을 동원해 엿듣고 알게 된 왕비 풍미녀에 대한 독살기도 때문일 것이었다. 당초 그들은 살수(殺手)를 써서 암살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꿔 서서히 목숨을 앗아가는 독을 써서 암살을 결행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었다.

이틀 전 예선창에서 골계로 갔던 경로의 반대방향 서안을 끼고 왼편으로 짚어 오르는 뱃길은 또 다른 묘미를 불러일으켰다. 산세를 세세하게 살펴 공략할 만한 지점이 있는지 톺아보면서 이사부는 지형의 윤곽들을 머릿속에다가 차곡차곡 쌓았다.

지세를 자세히 뜯어보았지만, 암벽은 높았고 그 위쪽 골짜기 역시 가파르고 깊었다. 대규모 군대가 만만히 접근해 들어갈 만한 곳이 도무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 뱃길에서 이사부는 다시 한 번, 울릉도의 험악한 지형에 난감한 심사를 금치 못했다.

사태감, 학포라는 곳을 지나고 태하를 막 휘돌아 가는 동안 갑자기 파도가 높아졌다. 지난 번 원정 때 느닷없는 물 소용돌이를 만났던 지점이었다.

근근이 헤쳐나간 뱃길 왼 쪽으로 이윽고 큰 바위섬이 하나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보니 바위섬은 가운데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고, 구멍을 에워싸고 있는 바위는 벽돌모양으로 깎인 육면체의 돌들을 일부러 켜켜이 쌓아올린 것처럼 가지런했다.

“저게 구멍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공암인 모양입니다요. 정말 기묘하게 생겼습니다요.”

바위를 바라보던 명진이 먼저 소리쳤다.

“그렇구나. 바위모양이 참 신기하구나.”

구멍바위를 왼쪽으로 놓고 오른 쪽으로 보이는 섬 끝에 비스듬히 삐죽 솟아올라 하늘을 찌른 산 또한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저 산이 성인봉에서 가리켜서 말씀하시던 송곳산이라는 곳이로군요.”

이사부가 산세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다른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조금은 시무룩해 보이는 우직이 말을 받았다.

“그렇지요. 저게 송곳산이라오. 신령한 기운이 있다 해서 사람들이 저 산 밑자락까지 올라가서 기도를 많이 올린답니다.”

*

예선창 집에 도착한 우직은 집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부산스러운 몸짓으로 마을길을 바장이며 무언가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이사부는 그의 들뜬 몸짓이 왕비를 시해하기로 했던 그들의 모의와 관련이 있음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전주님!”

방안에서 결가부좌하고 앉아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포구를 한 차례 다녀온 명진이 문밖에서 이사부의 의식을 흔들었다.

“들어오너라.”

명진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밖이 어둑한 것으로 보아 이미 해가 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명진의 얼굴에 뭔가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을 때 풍기는, 상기된 기운이 흘렀다.

“무엇이냐?”

“나루에 나갔다가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요.”

“이상한 소문이라니?”

명진이 몸을 앞쪽으로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뭍에서 잡혀 온 처자들이 근동에 연금돼 있다 합니다요.”

명진의 말을 듣는 순간, 이사부는 머리끝이 주뼛하고 서는 충격을 받았다. 뭍에서 잡아 온 처자? 그렇다면 산단화?

“그래? 그게 정말이더냐?”

“예.”

이사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거기가 어디라더냐?”

“나리촌 안쪽이라고 합니다요.”

지체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사부는 빠른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리촌으로 가자!”

“나리촌으로....지금 당장이요? .......아, 예예. 알겠습니다요.”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이사부를 쳐다보던 명진은 입술을 앙다문 군주의 표정에 눌려서 놀란 듯 금세 표정을 바꾸고 부랴사랴 채비를 마치고는 앞장섰다.

밖은 훨씬 더 어두워져 있었다. 별이 더러 보이기는 했으나, 초저녁치고는 사위의 어둠이 제법 깊었다.

예선창에서 나리촌으로 가는 길은 섬에 들어온 직후 성인봉에서 내려오면서 한번 걸어 본 적이 있는데도 길 같지도 않게 복잡했다. 그런 길을 명진은 더듬거리지도 않고 잘도 짚어서 앞장서나갔다. 참 재주가 많은 자로구나....이사부는 새삼 그의 재바른 움직임에 감탄하고 있었다.

울릉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평지 나리촌 쪽으로 한참을 나아가니 저만큼 들판 한 가운데, 첫날 성인봉에서 내려오면서 보았던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너와집과 투막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동네였다.

이사부와 명진은 마을이 갓 시작되는 길섶 바위 뒤에 일단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가옥들을 살폈다. 어둑한 가옥 풍경 속에서 창을 든 병사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투막집 하나가 좀 다르다 싶게 시야에 와 닿았다. 그림자로 보아 서너 명 쯤 되는 것 같았다.

“소인이 먼저 가서 염탐하여 오겠나이다.”

명진이 낮은 목소리로 자청하여 나섰다.

“그래. 우연인 듯 가장하여 접근해 보아라. 가서 잡혀 와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떤 상태인지도 살펴 오너라.”

이사부가 명진에게 조용히 일렀다.

명진은 소매 자락 속에 넣어 온 작은 방물 몇 점들을 확인하면서 마을 쪽으로 두리번두리번 나아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명진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보고했다.

“저기 저 투막집에는 뭍에서 살던 처자들 넷이 잡혀와 있다고 합니다요. 아, 참. 그리고 거기 노인 하나도 함께 붙잡혀 있는데, 병이 들어서 심하게 앓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요.”

맞구나. 이사부는 명진의 보고에 기쁜 마음이 앞섰다. 현덕 노인과 산단화, 그리고 마을 처녀들이 틀림없구나.

“그들을 만나볼 수 있겠느냐?”

명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길을 잡고 나서며 말했다.

“물론입지요. 투막집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삶아놨습니다요.”

이사부는 명진을 앞세우고 투막집으로 향했다.

“원래는 병사들이 더 많았는데, 며칠 전 골계에서 연통이 와서 그곳으로 다들 떠나고 지금은 여남은 명 정도만 남아있다 합니다요.”

가까이 다가가면서 본 투막집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병사들은 부러 자리를 비웠는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요?”

명진이 참억새로 지붕을 엮어 올린 투막집 우데기를 살펴 출입구를 찾아내고는 그 앞에 서서 외쳤다. 이사부는 아연 긴장이 들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만에야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옥수숫대로 얼기설기 엮은 이엉으로 둘러쳐진 우데기 중간쯤에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꺼지렁문 안쪽이었다. 이윽고 모기소리 만큼이나 가냘픈 처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밖에 누구시오니까?”

이사부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며 꺼지렁문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여기 혹시 산단화라는 이름의 낭자가 있으시오?”

“누...누구라고요?”

투막집 방문 밖 축담에 엉거주춤 나와 선 처자는 일단 산단화가 아니었다. 이사부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저기 바다 건너 해리현에 살던 산단화 낭자 말이요.”

처자는 말없이 돌아서서 투막집 방문을 열어젖히고는 몸을 돌려 안에다 대고 조심스럽게 소리쳤다.

“산단화 아씨! 누가 아씨를 찾습니다요.”

이사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방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희미한 관솔불이 겨우 사물을 분간할 만큼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투막집 안에는 억새와 수숫대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웅크려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사람의 모습들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이었다. 이사부는 좀 더 큰 목소리로 외치듯 물었다.

“산단화 낭자 여기 있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워있는 사람 옆에 웅크려 있던 그림자 하나가 벌떡 일어서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산단화입니다만, 대체 누구......시온지?”

산단화였다. 남루한 옷차림의 그녀는 찾아온 사람이 이사부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리고는 화들짝 놀라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낭자! ..... 나요!”

“아니! 아니! .....군주님께서 어떻게 여길?”

너무 어두워서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산단화는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저만큼 누워있던 노인이 쿨럭쿨럭 가래기침을 토했다. 이사부는 그 노인이 산단화의 아비인 현덕 노인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사부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현덕 어르신! 현덕 어르신이시지요?”

노인은 미처 눈을 열지 못한 채 다시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겨우 샛눈을 뜨고 큼큼 목을 가다듬어 밭은기침을 뱉어가며 가까스로 말했다.

“아! 군주님께서....군주님께서 여기는 대체 어인 일이시나이까?”

노인의 목소리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말하자면 대단히 복잡하다오. 그건 그렇고 어찌하여 저들은 이곳에 여러분들을 연금하고 있는 것이오?”

현덕 노인은 대답대신 가래기침을 한동안 이어갔다. 산단화가 대신 말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우리를 살려두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무슨 쓰임을 따로 정해놓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이사부는 잠시 고개를 돌려 명진에게 일렀다.

“바깥을 잘 경계하거라.”

“예. 알겠습니다요.”

명진이 한 차례 고개를 주억거린 뒤 밖으로 나갔다. 이사부는 현덕 노인을 향해 말했다.

“몸이 편찮으신 듯한데, 상태가 어떠하시오? 많이 안 좋으시오니까?”

“아무래도 객지 섬 곳 물과 바람이 몸에 안 맞아서 탈이 난 것 같나이다. 게다가 나이가 있으니 노환이 났다 여겨야 하지 않겠나이까?”

그렇게 말하는 현덕 노인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전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살이 내려 피골이 상접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짙어진 주름, 퀭한 눈빛이 보기에 흉했다. 이사부는 더 이상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현덕 노인이 큼큼 기침을 삼키며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일전에 울릉도로 진격해오다가 여의치 않아 물러가신 일이 있다 들었나이다.”

“그런 일이 있었소. 우해왕이란 자가 아무래도 여간내기가 아닌 듯하오. 술법도 잘 쓰는데다가 용의주도한 지략도 있는 자 같구려. 뭍에서 예까지 이르는 바다가 험하기 짝이 없고, 울릉도의 지세마저 철옹성이니 난감한 상황이라오. 그래서 우해를 아주 잡을 묘책을 찾을 양 이렇게 잠입을 해왔다오.”

“그러셨군요. 제가 보기에도 우해왕은 범상한 사람이 아닙디다. 도술을 쓰는 것은 물론 용력 또한 남다른 자인 듯 했나이다. 그나마나...이런 잠행이라니, 너무 위태하지 않나이까?”

“위험하지만, 어찌하겠소. 난관을 헤쳐 나갈 방책을 쉬이 찾지 못하겠기에 선택한 고육지책이라오.”

그 즈음에서 현덕 노인은 깊은 가래기침을 다시 시작했다. 이사부는 곁에 서있던 산단화에게 말했다.

“낭자. 따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겠소?”

그러자 산단화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방 한쪽으로 난 문을 가리켰다.

“저기 정지가 있으니 그리로 가시지요.”

그 때 바깥에서 망을 보고 있던 명진이 안쪽이 궁금했던지 방문을 밀치고 들어와 눈길을 한 차례 휘둘러 살펴보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정지는 바닥이 우멍했다. 깊이 판 바닥에서 아궁이를 내어 불을 지피도록 돼 있었다. 아궁이에는 타다 만 솔가지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채 불씨를 품고 있는 듯 따스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이사부와 산단화는 아궁이 앞에 나란히 앉았다.

“그래...낭자는 건강이 괜찮소?”

“예. 병환이 깊어 고통 받으시는 아버님에 비하면, 소녀의 작은 불편쯤이야 굳이 입에 올릴 일이 되겠나이까?”

얼굴은 많이 야위었지만, 그녀의 말을 들으니 기개는 옛적 그대로였다. 아비를 끔찍이 생각하는 마음 또한 변함이 없어보였다.

“낭자!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하오.”

산단화가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아니옵니다. 소녀 뜻밖으로 이런 험한 사지(死地)에서 군주님을 다시 뵈오니 그저 황망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뵈옵기를 마음 속 깊이 기원하긴 했사오나, 험지에서 막상 뵈오니.... .”

울고 있었다. 산단화는 결국 누르고 있던 슬픔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슴벅슴벅 눈물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사부는 견디기 힘들만큼 가슴이 아렸다.

“내 곧 이 섬을 빠져나갈 배를 댈 터이니, 함께 뭍으로 가십시다.”

“ .... .”

산단화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낭자. 내 결코 낭자를 잊은 적이 없소. 약속한 대로 삼년의 기한이 차면 반드시 낭자를 데리러 갈 심산이었다오. 그런데 천만 뜻밖에 이런 괴이한 변고를 당하여 그만 낭패가 생기고 말았구려.”

이사부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는 산단화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연전 해리현 바닷가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모습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만감에 빠져있던 산단화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녀의 젖은 눈망울이 모종의 굳은 마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니옵니다. 죽기 전에 군주님을 이렇게 한 번 더 뵈옵는 것만 가지고도 소녀는 마음으로 행복할 수 있나이다. 노환이 깊으신 아비를 두고 소녀 혼자서 배를 탈 수도 없거니와, 설령 부친을 모시고 배에 오른다 한들 쇠할 대로 쇠하신 노인이 험한 뱃길을 견뎌내지 못하실 것입니다. 소녀 걱정은 마옵시고, 군주님께서는 어서 뭍으로 나가 출병하셔서 나라를 위하여 소명된 장부의 큰 뜻을 이룩하소서.”

삼 년이 가깝도록 흘러간 세월 동안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이 아비를 섬기는 그녀의 모습이 하도 어여쁘고 안타까워서 가슴이 아팠다. 어찌 저리도 강고하게 아비를 위하여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또 은애하는 사나이의 길을 귀히 여기고 자신을 낮추고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오. 내 어찌하든 이곳을 벗어날 방도를 찾을 터이니 함께 빠져나갈 준비를 해주시오.”

이사부는 간절한 마음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산단화의 얼굴에는 흔들리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녀의 마음인들 왜 그리하고 싶지 않겠나이까? 하오나.....하오나, 예감 컨데 아비의 명이 길게 남지 않은 듯 보이는 형편인지라 소녀로서는 도저히 무리를 감행할 수가 없나이다.”

산단화의 눈에 눈물이 다시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이사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처연한 심사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타다 남은 나무에 다시 불이 붙었는지 아궁이 안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

그때 부엌으로 난 문이 벙긋 열리면서 낭자 하나가 목을 내밀었다.

“저기요. 촌주 어른께서 찾으십니다요.”

이사부와 산단화는 얼른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현덕 노인은 여전히 가래가 잔뜩 낀 숨소리를 내며 희미한 눈동자로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산단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얘야. 내 군주님께 긴히 올릴 말씀이 있으니 너는 좀 나가 있거라.”

“예, 아버님.”

산단화는 이사부를 한 번 바라본 다음 가만가만한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현덕 노인이 가래기침을 몇 차례 토한 뒤 입을 열었다.

“이제 이 늙고 병든 몸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그쯤에서 이사부는 손을 내저으며 노인의 말을 끊었다.

“아니오. 이제 이곳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셔야지요.”

“아니옵니다. 제 몸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제가 잘 아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두 가지만 말씀 올릴까 하옵나이다. 우선, 제가 이 곳 울릉도에 잡혀 와서 유심히 들은 말이 있어서 알려드릴까 하나이다. 울릉도 병사들이 자투리 시간에 나무를 잘라다가 주머니칼로 남근(男根)목각을 자꾸 깎아서 허리춤에 달고 다니기에 그 연유를 물어보았나이다. 그들은 한사코 그저 심심풀이로 그리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소인이 짐작하기에는 아무래도 그들이 출병을 할 때 필요한 물건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여겨집니다.”

“출병에 필요한 목각남근이라?”

이사부도 그들의 목각남근이 어쩌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무슨 신물(神物)로 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러하나이다. 그들 중에는 목각남근을 몇 개씩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자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 목각남근이 무슨 용처가 있긴 있나보오이다.”

말을 많이 하느라고 지치고 힘들었던지 현덕 노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한참만에야 목을 추스른 현덕 노인이 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올릴 말씀이 또 하나 있나이다.”

“무엇이오니까? 어서 말씀하시오.”

“다름이 아니옵고....일찍이 딸자식을 군주님께 내어드렸다면 오늘날 이 같은 참담은 겪지 않아도 될 것을....이 늙은 아비가 어리석기 짝이 없었나이다. 염치없는 부탁이오나 부디 제 여식을 이곳에서 탈출시켜 주시옵소서. 틀림없이 저 아이가 늙고 병든 아비를 두고 떠날 수 없다 할 것이나, 괘념치 마시고 데려가 주옵소서.”

“그렇지 않아도 내가 그리 말하고 있는데 낭자가 고집을 꺾지 않는 구려.”

“그렇더라도 한사코 저 아이를 뭍으로 데려가 주옵소서.”

“알겠소. 내 반드시 산단화 낭자는 물론, 어른까지 함께 모시고 나가리다.”

그 때, 밖에 있던 명진이 출입문을 펄쩍 열고 들어왔다. 산단화가 그 뒤를 따라서 들어왔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각입니다요. 잠시 피해주었던 병사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저만큼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요.”

이사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산단화를 향해 말했다.

“낭자! 다시 올 터이니 떠날 채비를 해두시오. 방금 현덕 어른과도 얘기가 다 됐으니, 부디 뜻을 따라주오.”

“....... .”

산단화는 뭐라고 선뜻 말을 하지 못한 채 또다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자, 그럼 지금은 이만 가겠소.”

산단화는 울음 섞인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군주님. 부디 대업을 완수하여 큰 공덕을 쌓으시옵소서.”

“낭자.....마음 굳게 먹고 조금만 참으시오.”

이사부가 그렇게 산단화를 다독거리는 사이에, 명진이 이사부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하늘에는 어느새 무심한 달이 휘영청 떠올라 있었다.

*

예선창 집 앞에는 이사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직이었다.

“이 밤중에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이시오?”

“갑갑하여 여기저기 바람이나 좀 쐬고 오는 중입니다.”

“그러십니까? 들어가서 얘기 좀 하십시다.”

우직은 그러면서 자기가 앞장서서 집안으로 들어가 이사부가 묵고 있는 방문을 열었다.

“무슨 급박한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이사부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우직의 얼굴에 피곤기와 함께 긴박한 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박 전주께서는 서둘러 이곳을 떠나셔야 할 것 같소이다. 어쩌면 한바탕 소동이 일지도 모르오. 와중에 애꿎은 화를 당할 수도 있는 판이라.... .”

왕비가 죽었구나....이사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몹쓸 일이라도 났습니까?”

시치미를 뚝 따고 우직에게 물었다. 우직의 표정에는 왕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이미 다 씌어져 있었다.

“아니, 뭐 특별한 일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뭔가 울릉도 돌아가는 낌새가 순탄치가 않아서 하는 말이오.”

“하긴 거래도 다 끝나고 구경도 이만큼 하였으니 우리도 곧 돌아가야 할 형편이긴 하오만... .”

“내 수하에 있는 배꾼들에게 내일 새벽에 배를 띄워 전주님을 뭍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일러놓았으니 그리 움직이시지요.”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새벽에 출발하겠소.”

이사부는 명진을 향해 말했다.

“명진아. 우직 선주께 뱃삯을 넉넉히 치르거라.”

“알겠습니다요.”

그러자 우직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올시다. 내 박이종 전주 같은 귀인을 만난 것을 천생의 인연으로 알 터이니 개의치 말기를 바라오.”

이사부가 다시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소이다. 내가 우직 선주를 만나 여러 신세도 지고 좋은 구경도 한데다가, 이렇게 돌아갈 배편까지 마련해주시는데 그냥 말 수는 없소.”

그럼에도 우직은 한사코 손을 내 저었다.

“아니올시다. 절대로 아니올시다...... . 굳이 그러실 양이면, 내일 배를 부릴 수하들에게 성의표시나 조금 하시오. 더 이상 뱃삯이니 뭐니 하는 말은 거두어 주시길 부탁하오.”

우직의 뜻이 워낙 완고했다. 이사부는 더 이상 논란을 벌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에게 물어볼 말들이 떠올랐다.

“막상 섬을 떠나자하니 궁금한 게 두어 가지 있소. 여쭈어 봐도 되겠는지요?”

“무엇이오?”

“먼저, 여기 나리촌 마을에 뭍에서 데려온 처자들이 있다던데, 그들을 이리 오랫동안 잡아두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 아시오?”

우직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뭍에서 데려온 그 처자들을 어디에다 쓸 요량인지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라오.”

이사부가 한 차례 덧붙여 묻자 우직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여기 동해바다에는 바다를 통해서 재앙을 일으키는 해랑신(海浪神)이라는 여신이 살고 있다고 하오. 워낙 심술궂어서 풍랑을 몰고 오거나, 그물을 찢어놓거나 아니면 고기가 오랫동안 안 잡히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다를 흔들어 배들을 전복시키기도 한다오. 그래서 이곳 울릉도에서는 해마다 칠월이면 그 해랑신을 달래기 위해 바다에서 큰 제(祭)를 올리는데, 그 제에서는 계집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오래 된 풍습이 있다오. 그 동안에는 울릉도에 살고 있는 처자를 선발하여 제물로 올려왔으나, 내가 알기로는 올 여름에는 뭍에서 데려온 그 처자들을 한꺼번에 제물로 쓸 작정이라고 들었소.”

우직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사부의 가슴에 훅 하고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그래서 산단화 일행을 잡아두고 있구나.... . 그렇다면 더더욱 서둘러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또 한 가지 물어볼 말이란 무엇이오니까?”

우직이 궁금해 하는 말투로 물어왔다.

“다름이 아니라, 목각남근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소. 여기 군사들이 틈틈이 나무로 남근을 깎아서 허리춤에 매달고 다닌다 하는데, 그건 또 뭐에다 쓰자는 물건이오?”

이사부의 질문을 들으며 우직은 비식하니 입가에 웃음기를 피워 올렸다.

“박 전주께서는 참으로 호기심이 많은 분이시구려. 그건 이러하다오. 해마다 수장되어 해랑신에게 바쳐진 처자들이 워낙 많다보니 바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여귀(女鬼)들이 있겠소? 그들 한 맺힌 여귀들이 특히 바다에 나서는 군선들에 해코지를 하는 일이 잦아서 그를 달랠 양법(禳法)으로 찾아낸 것이 목각남근이라오. 내 직접 보지는 않았으나 왕께서 술법으로 그 여귀들을 부린다는 이야기도 있소이다.”

“아, 그렇군요.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소이다. 그런 별난 사연들이 있었구려. ....그나마나 이 밤이 지나면 이 몸은 울릉도를 영 떠나야 할 판이니, 우직 선주를 다시 볼 날이 있을까 두렵고 섭섭한 마음이오이다.”

“그러게요. 살다가 이렇게 마음이 맞는 귀한 분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이런 이별이라니 아쉽기 짝이 없구려.”

“인연이 이렇게 한번 닿았으니 살아있다면 다시 만날 날도 있을 것이오. 하여간 그 동안 너무나 고마웠소.”

“내일 새벽 수하 배꾼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날이 밝는 대로 포구로 나가시오. 혹여 나를 보지 못하더라도 서둘러 배를 타고 떠나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우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부도 덩달아 함께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쪼록 무탈하게 잘 지내시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반드시 다시 이곳 울릉도를 찾아오리다.”

“알겠소. 뱃길 여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니 눈을 좀 붙여 두시구려.”

우직은 그 말을 끝으로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사부와 명진이 문밖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

“명진아. 이리 가까이 오너라.”

우직을 보내고 난 다음 이사부는 명진을 불러 귓속말을 시작했다.

“새벽녘에 나리촌으로 간다. 그리고 산단화 낭자 일행을 구출할 것이다.”

“예? 구출....을 한다고 하셨나이까?”

“그렇다.”

“그들 모두를 데리고 배를 타실 작정이온지요?”

“그러하다. 신 새벽 첫닭이 울 무렵 나리촌 투막집으로 가서 인질들을 구한 다음 곧바로 포구로 가야 한다. 모두를 배에 태워 탈출할 것이다.”

명진은 무리한 작심이 아니냐는 듯 고개를 거푸 갸우뚱거렸다.

“지키는 군사들은 어찌하나이까?”

“투막집으로 일단 몰래 잠입해서 처리한다. 여의치 않을 경우 지키는 병사들을 모두 처치할 것이다. 그리 알고 단단히 채비하거라.”

“그...병석에 있는 노인은 어떻게 하실 요량이시나이까?”

“함께 데리고 갈 것이다.”

“알...알겠나이다.”

명진이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국 최고의 명장 이사부 군주 아니던가. 장군의 용력을 아는 명진으로서는 그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연재 17회로 이어집니다-

<註>

* 우데기(건물 바깥에 담처럼 둘러쳐져 있는 일종의 외벽) * 꺼지렁문(거적문) *축담(벽체와 우데기 사이의 공간) * 정지(부엌) * 양법(禳法 신에게 기도하여 재앙과 질병을 물리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