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 휘 / 그림 문 악 보

제6장- 해후(邂逅)

6.2 탈출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졸음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이사부는 몸을 일으켜 결가부좌하고 앉았다. 정치의 도덕인 ‘길’과 기후기상으로서의 ‘하늘’과 지리적 이점인 ‘땅’과 지도자의 능력인 ‘장수’와 제도와 질서로 ‘법’을 가늠해본다. 적국을 살피는 다섯 가지 요소로 살펴보건대 우산국은 ‘하늘’과 ‘땅’과 ‘장수’는 가졌으되 ‘길’과 ‘법’에서 하자가 있는 나라다. 그 중 ‘하늘’과 ‘땅’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상수(常數)이니, ‘장수’의 재능을 무력화시키는 일만이 유용한 타개책이 되리라.... .

시각이 얼마나 흘렀을까. 새파랗게 곤두서는 신경으로 밤을 지새우며 불에 댄 듯 화끈거리는 눈시울을 누르고 있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우직의 집 안채에서 왁자지껄 소음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귀에 익은 목소리의 고함이 저렁저렁 들려왔다.

“누구냐? 누군데 감히 나를 끌어가려고 하느냐?”

우직이었다. 이사부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명진도 퍼뜩 일어나 이사부의 뒤를 따랐다. 일단의 창칼을 든 병사들이 대문 앞에서 우직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대왕폐하의 형뻘 되는 사람이다. 진정 대왕께서 이리 하라고 시켰느냐?”

왕의 형뻘 되는 사람? ....아니, 그렇다면 저 우직이 우해왕의 가문이었단 말인가? 우직이 내뱉는 뜻밖의 말에 이사부는 큰 놀라움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우직의 고래고함에도 아랑곳없이 병사들 중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군사가 흥분기가 전혀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우직을 달랬다.

“폐하께서 정중히 모셔오라 하셨으니 소란을 거두시고 동행해주시지요.”

안채에서 나온 식솔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우직은 분기를 참지 못해 식식거리며 버티고 서 있었다. 병사들은 완력을 쓸 기색이 전혀 없이 그냥 우직을 둘러싸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병사들을 향해 호통을 치던 우직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을 하더니 돌아서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식솔들에게 일렀다.

“내 잠시 왕궁을 다녀올 터이니,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마라.”

우직이 병사들의 동행 재촉에 순순히 응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있었다. 병사들에 의해 끌려가게 된 우직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이사부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겨를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상스럽게도, 우직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조바심 따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 가자!”

우직은 당당한 몸짓으로 병사들보다 한발 앞서서 포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 광경을 그냥 지켜보고 있자니 이사부의 심사가 매우 복잡해졌다.

저 사람이 우해의 일족이었다는 말인가. 그런 신분인 줄 모르고 내가 여러 날을 가까이 지내며 이런 저런 일을 함께 겪었다는 이야기인가.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노릇인가. 아니, 그런 입장의 사람이 어쩌자고 왕의 학정에 울분을 토하는 것이며, 왕비를 시해하는 일마저 주도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곰곰 돌이켜 보니 그 동안 우직이나 그의 일당들이 우해의 폭정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는 것은 보았어도, 왕을 직접 타도하거나 해칠 목적으로 무슨 험한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 결 같이, 풍미녀를 왕비로 맞이하는 바람에 왕이 잘못돼가고 있다는 요지였고, 그래서 왜녀인 왕비를 제거해야 우산국이 비로소 올바른 나라가 된다는 논리였다.

“전주님!”

우직이 병사들과 함께 사라진 포구 쪽 언덕길의 칠흑 어둠을 바라보고 서서 넋이 나간 듯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이사부를 명진이 소리쳐 깨웠다.

“으응. 그래.”

“우직 선주가 한 말이, 자기가 우해왕의 친족이라는 뜻이옵니까요?”

“네게도 그렇게 들렸느냐? 나도 그렇게 들었다.”

“그렇다면 이거 어찌 되는 일이옵니까요? 배를 댄다는 말도 다 거짓이고, 위태로울 수 있는 일 아니옵니까요?”

우직과 당충, 연철 등의 일당이 해온 일의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는 명진으로서는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 있을 것이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소인의 생각으로는 지금 곧바로 달아나는 것이 상책일 듯싶습니다요. 이미 우리의 정체가 저들에게 낱낱이 알려졌을 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요?”

나름대로 추리력을 발휘한 명진의 한 걱정이었다. 밤바람이 매웠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이사부는 앞장서서 우직의 집 행랑채 숙소로 들어갔다. 명진이 불안을 씻어내지 못한 눈빛으로 뒤를 따랐다.

이사부는 말없이 자신이 짊어지고 다니던 등짐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짐들을 모두 꺼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숨겨두었던 반궁(半弓) 부품과, 화살이 한 움큼 든 궁대(弓帶)를 꺼내어 익숙한 손놀림으로 조립하기 시작했다. 부린활의 한쪽 도고지에 궁현(弓弦)의 심고를 걸었다. 그 끝을 바닥에 세우고 어느 정도 편 다음 줌통을 발로 밀어 끄응 소리를 내며 다른 쪽 도고지에 맞은 편 심고를 잡아 걸었다. 그러자 네 뼘 남짓 되는 작고 탄탄한 얹은활이 만들어졌다. 이사부는 앉은 채로 활시위를 힘차게 당겨보며 점검했다.

비장의 무기를 꺼내드는 이사부를 바라보며 명진은 더욱 조바심이 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했다.

반궁 조립을 끝낸 이사부는 잠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눈을 조금 더 붙였다가 첫닭이 울면 나서자.”

명진도 이사부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잠자리에 비스듬히 몸을 눕혔다.

우직이 우해의 형뻘이라.....이사부는 머릿속이 하얗게 퇴색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거 참......세상에 모를 일이 너무 많구나.... . 걱정이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깊이 헤아려보면 우직으로 하여 낭패를 당할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졸았던 것 같은데, 첫닭이 울었다. 의식의 문을 여니 윗목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명진이 벌써 일어나 등짐을 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사부는 몸을 일으켜 길게 기지개를 켰다.

“기침하셨습니까요?”

“그래....눈을 좀 붙이긴 한 거냐?”

“못 잤습니다요. 잠이 통 오지 않습니다요.”

“너무 심려하지 말거라. 서둘러 나리촌으로 가자.”

이사부와 명진은 처음 섬에 들어올 때보다 조금 가벼워진 등짐을 하나씩 나눠지고 우직의 집을 나섰다. 이사부의 허리에 궁대가 매어져 덜렁거렸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새벽바람이 워낙 차가워서 부르르 진저리가 났다.

두 사람은 한달음에 나리촌 안쪽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숙소에서 나올 때의 한기 따위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군주님께서는 잠시 이곳에 계시옵소서. 소인이 먼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요.”

명진이 등짐을 벗어놓았다. 이사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들에게 발각되더라도 일이 아주 어그러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중하거라.”

“걱정 마시옵소서. 은밀히 살펴보고 오겠습니다요.”

명진은 조심스런 몸짓으로 마을 안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런데 머지않아 마을에서 황급한 발걸음으로 되돌아 나오는 명진의 모습이 보였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명진은 숨을 헐떡이며 이사부가 있는 마을 입구로 달려왔다.

“군주님! 저기 투막집이 텅 비었습니다요. 안팎으로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습니다요.”

“집이 비다니?”

“문은 열려있고, 집안에 이부자리건 옷가지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 같사옵니다.”

“병사들도 없더냐?”

“아무도 없습니다요.”

이사부는 등짐을 그 자리에 둔 채로 앞장서서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명진의 말처럼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분명히 산단화 일행이 묵고 있던 투막집 안에는 수숫대 썩는 냄새만 진동하고 있을 뿐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인근에 병사들도 모두 사라진 것을 보면 근처의 다른 집으로 옮겨간 것 같지도 않았다.

이사부는 집 앞으로 나와 통견원문술을 써서 사방으로 기를 던져 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산단화 일행의 기척으로 느낄 수 있는 반응이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일까. 혹여 참혹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이제 어찌해야 할 것인가. 우직마저 잡혀 간 마당에 이곳에 더 머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서둘러 배를 타고 떠나야 하는데..... . 어찌해야 옳은가.

“포구로 가자.”

잠시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겨있던 이사부는 일단 떠나기로 결심을 굳히고 명진을 재촉해 앞세웠다.

“게 섰거라!”

등짐을 다시 지고 부지런히 걸어서 나리촌을 막 다 빠져나왔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이사부 일행을 향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언덕 위 저만큼에서 일단의 군사들이 이사부 일행을 향해서 소리치며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미명 속에서 창을 든 자가 둘, 칼을 든 자가 하나 그렇게 셋이었다. 군사들의 몸짓에는 이미 이사부 일행을 공격하려는 살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들에게 발이 묶여 지체할 시간이 있지 않았다. 이사부는 군사들을 처치하기로 결심했다.

“명진! 꼼짝 말고 엎드려 있거라.”

이사부는 그렇게 말하면서 등짐을 던지듯 벗어놓았다. 그리고는 빠른 동작으로 궁대를 열어 화살 세 개를 꺼낸 다음 함께 오늬를 먹이고는 몸을 옆으로 틀어 대각선으로 반궁을 겨눠 시위를 힘차게 당겼다. 그리고는 숨을 멈추고 달려 내려오는 군사들이 좀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왼 손가락 사이에 걸린 화살대를 잠시 조정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오른손가락을 풀었다.

이사부의 활은 번개 같았다. 순식간에 세 명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억 소리를 내며 가슴을 움켜쥐고 고꾸라졌다. 화살을 놓고 난 이사부가 재빠르게 다시 등짐을 걸머졌다. 그리고는 납작 엎드려 이사부의 속사(速射)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명진에게 외치듯 말했다.

“뛰어라! 포구로 가자!”

이번에는 이사부가 앞장서서 내달렸다. 명진은 한참을 따라서 달리다가 하늘에 닿을 듯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청거렸다. 명진이 헉헉대는 숨 사이로 물었다.

“화살을 맞은 군사들이 살아있으면 어떡합니까요?”

울릉도를 다 빠져나가지 못할까봐 내놓는 걱정이면서, 우직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이사부가 걸음걸이를 늦추며 대답했다.

“살아있지 못할 것이다. 화살들은 심부에 명중했고, 화살촉에 맹독이 묻어있어서 모두 즉사했을 터.”

“그런데 그들이 왜 우리를 공격했을까요?”

“우리의 정체를 다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또다시 나리촌에 나타난 것이 의심스러워서 일단 추포하려고 했을 게다.”

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부가 다시 명진을 채근했다.

“가자. 서둘러야 하느니라.”

포구까지 가는 동안 이사부의 심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직이 잡혀 간 것은 십중팔구 풍미녀의 변고와 관련이 있을 뿐 이사부 자신의 잠행과 연관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산단화가 있는 곳을 근근이 알게 돼 가까스로 잠시 만나고 온 직후에 하필이면 그 일행이 감쪽같이 사라진 일은 과연 어떤 손이 한 일일까.

명진의 걱정처럼 저들이 우직을 통해서 뭔가 정체의 꼬리를 잡았다면, 병사들이 곧바로 우직의 집으로 달려왔을 일이었다. 알쏭달쏭한 가운데도, 산단화를 데리고 탈출하려는 계획에 대해 우직이 눈치를 챘거나 할 리도 만무하리라는 추정이 마음속에 더 강하게 자리를 잡았다.

“포구에 거의 다 왔나이다.”

앞서가던 명진이 돌아서서 말했다.

아직 해가 뜨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으나, 희붐하게 밝아오는 여명의 기운 덕에 사물을 분간하기 어렵지는 않을 정도는 되었다. 포구에 이르자, 배에 돛을 달고 있던 두 사람의 사내 중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붙여왔다.

“뭍으로 가신다는 박이종 전주님 아니온지요?”

사내의 음성에 바닷바람이 섞여 거칠게 들려왔다.

“그렇소이다.”

“저희 선주님께서 각별히 모시라 이르셨습니다. 어서 배에 오르시지요.”

“고맙소이다. 먼 길에 고생하시게 생겼구려.”

“아니옵니다. 저희들이야 늘 하는 일이오니 심려하지 마시오소서.”

이사부는 명진과 함께 돛배에 올랐다. 사내들은 익숙한 몸짓으로 배를 띄워 바다 쪽으로 노를 저어나갔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울릉도를 바라보았다. 여명 속에서 섬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모를 산단화를 그냥 두고 섬을 떠나는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어찌해볼 도리가 따로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안타까움만 깊어갔다. ...죽기 전에 군주님을 이렇게 한 번 더 뵈옵는 것만 가지고도 소녀는 큰 행복으로 여길 수 있나이다. ...소녀 걱정은 마옵시고, 군주님께서는 어서 뭍으로 나가 출병하셔서 나라를 위하여 소명된 장부의 큰 뜻을 이룩하소서....산단화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염치없는 말씀이오나 이곳에서 부디 제 여식을 탈출시켜 주시옵소서....현덕 노인의 간절한 목소리도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사부는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아,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로구나. 산단화 낭자. 부디 살아 있으시오. 내 반드시 돌아와 우산국을 점령하고 그대를 구할 것이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큰 바다 한복판으로 접어든 고깃배의 뱃전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재 18회로 이어집니다-

<註>

* 반궁(半弓, 앉아서 쏠 수 있는 짧은 활) * 궁대(弓帶, 활을 넣는 자루) * 부린활(이궁弛弓, 활시위를 벗긴 활) * 궁현(弓弦, 활시위) * 심고(활시위 고리) * 얹은활(장궁張弓, 시위를 걸어놓은 활)